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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첩비(幸州大捷碑) 비문 해설
조선제도도원수 정헌대부지중추부사로서 의정부좌찬성겸 의금부부사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의 관직을 추증받은 권율공이 사망한지 1주년이 되어 막료였던 인사들이 과거 행주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 그 공적이 대단히 컸던 것을 기려 그곳에서 가장 높은 곳에 비를 세워서 그의 공적을 영원히 다음 세대에 전할 것을 결정하고 비문을 지었다
임진년 4월 일본은 대병력으로 침략하여 여러 진과 읍을 함락시켜, 우리나라는 중앙과 지방이 혼란했다. 임금께서 '권모가 훌륭항 인재로 알고 있는데 지금 어디있느냐'로 물으신 후 의주목사로 있던 공을 광주목사로 전임시켰다. 모든 관료들은 남방을 사지로 보고 있었으나 공은 명령을 받고 즉시 현지에 달려갔다. 그러나 공이 광주에 도착하자 이미 서울이 함락되고 임금은 의주로 파천한뒤였다. 공은 방어군중위장의 책임을 맡고 충청도 군대와 합류하여 이들을 거느리고 수원에 진주하였으나 전열이 정비되지 않아 광주로 돌아갔다. 다시 나주목사, 전라도 순찰사로 임명을 받은 공은 방어사로 하여금 이치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전주로 가서 1만여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수원의 독성에 주둔하고 이 사실을 나라에 보고하였다. 서울에 주둔한 적은 공의 군대가 요충지대를 점령하고 있는 것을 꺼려하여 수만명을 3개의 부대로 나누어 오산등지에 배치하고 싸움을 도발하였으나 공의 유격전술에 부준적으로 격파되어 철퇴하였다. 계사년(1593) 2월에 공은 정예군 약 2,300명을 직접 인솔하여 양천강을 건너서 고양의 행주산성에 주둔하였다. 적은 평양에서 죽음을 면한자, 황해도에서 탈출한 자, 개성에서 후퇴한 자, 함경도에서 소문을 듣고 도망쳐 온 자들이 모두 서울에 집결되어 서울의 적세는 다시 강성하였다. 이달 12일 새벽에 척후병이 적군의 공격기색이 있다고 보고하고 공은 동요하지 말도록 경계하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성에서 5리쯤 떨엊ㄴ 적군은 벌써 벌판 가득히 몰려와 성을 포위하는데 그 수를 해아릴 수가 없었다. 우리군사들은 결사적으로 응전하며 화살과 돌을 빗발처럼 쏘았다. 왜적은 군대를 세패로 나누어 교대로 쉬어가면서 싸우는데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세차례에 걸쳐 싸웠으나 불리하자 갈대를 묶어 성에 불을 질렀다. 불은 목책까지 연소되었으나 성안에서는 물을 가지고 불을 껐다. 서북쪽 낮은 성에 승려군이 지키고 있었는데 약간 동요된 틈을 타서 적군은 아우성을 치며 들이 밀려왔다. 이 통에 온 군대가 흔들렸으나 공은 칼을 뽑아들고 여러 장군을 호령하여 앞을 다투어 칼을 휘두르며 육박전을 감행하였다. 적은 크게 패하여 네군데서 전사자의 시체를 모아서 태우고 달아났다. 우리 군사들이 그 나머지의 적군을 벤것도 130명에 달했고 적군이 버린 깃발,투구,갑옷,무기 등을 노획한 것이 헤아릴수 없을만큼 많았다. 그후 공은 군대를 파주에 있는 산성으로 옮겼다. 적은 행주에서의 참패를 보복하려고 군대를 끌고 서쪽으로 나왔다가 공의 성벽이 행주에서 보다도 더 삼엄한것을 바라보고 '우리가 침범해서는 안되겠다'고 경계하며 되돌아 간것이 세번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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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자는 언신, 본관은 안동, 고려의 태사 행(幸)의 후손이며, 조선왕조에서는 찬성 근의 6대손이고 영의정 철의 아들이니 그의 가문에서 이어진 인격과 높은 학문은 사람을 통솔함에 있어서는 더욱 온화하고 사랑으로 대하는 성의를 보였고, 엄격함만을 지니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환심을 얻어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그들은 공을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공은 46세에 임오년 문과에 합격하여 낭관에서 바로 당상관으로 올라갔으나 문과 출신의 장군으로 활약하였기 때문에 중앙정부에 있을때가 적었으며, 어려운 시국을 당하여 정치적으로 별로 업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그런데 공의 과거 부하였던 막료와 사병들이 공의 덕의를 사모하면서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으므로 다투어 물자를 내놓아 비를 세우기로 하였으니 갸륵한 일이다.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최립이 글을 짓고, 통훈대부행가평군수 한호가 썼으며, 절충장군행대호군지제교 김상용이 두전을 썼다. 선조35년(1602) 6월에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