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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 모슬포 절간 창고와 한림수협창고 및 무릉지서에서 분산수용, 경찰의 감호하에 가족과의 면회를 허용하고 지병자의 병보석을 시행하는 등 유화적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사찰계장(채00)의 주관하여 자의적 판단에 따라 A(23명) B(68명) C(144명) D(109명) 4등급으로 분류 살생부를 작성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것으로 사료됨. (2)집단학살과암매장 1950년 6월 25일 북괴군의 남침으로 서울을 떠난 장부는 대전을 거처 대구.부산으로 퇴각하였으며 낙동강 전선이 누란지세에 처하게 되자 정봉의 최종 피난처를 제주도로 잠정 결정하여 계엄사령부에 송치된 252명 중 61명이 동년 7월 16일 정부군의 인계된 20명은 섯알오름에서 학살하고 나머지 41명은 행방불명 상태인 가운데 동년 8월 20일 새벽 2시부터 5시사이 세 곳의 구금자를 순차에 따라 학살장소로 이송하는 과정에 자택에 있던 대정면 사무소 공무원 이현필 좌용운을 비롯 정이환(청년회 총무) 장성림(연초판매) 좌용문(도정업) 이상봉 (연초판매) 좌용문 (도정업) 이 상봉 (청년회간부)등 6명을 학살장소로 무단 강제 압송할때 이승과 저승 간절연 의 황천길에 신발을 벗어 던져 족적을 알리며 섯알오름 탄약고터의 이르자 앞에 이송된 한림수협창고와 무릉지서에 구금되었던 60여명은 폭파된 탄약고 남사면에서 모슬포 절간창고에 구금되었던 130명은 웅덩이에서 모슬포 주둔 정부군에 의해 집단 학살한후 시신을 가족들에게 인도하지 않고 암매장하였으며 그 비인도적인 만행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는 한편 군경에 의한 경비를 강화했다. (3) DNA 검사로 60년의 한(□)을 풀다 1950년 7월 16일 41명을 집단학살한 가해자들의 함구령으로 희생자들의 행방이 묘연한 가운데 산방상 앞바다 수장설 등으로 억측이 난무하여 60여년 동안 망연자실 번민하던차 2007년11월 27일 정뜨르비행장 민간인 학살장소에서 발굴한 유해의 DNA 검사결과(2010.03) 행불자 41명 중 송대길(청년회임원) 김회전(대정교교사) 등의 신원이 확인됨으로써 행방불명된 전원이 동일장소에서 학살된 것으로 추정하게 되었으며 2010년 국가상대 손해배상소송에 동참하는 한편 양신하(백조일손유족회고문)의 전극적인 탐문 조사과정을 통하여 당시 희생자 신원을 확인하게 되자 예비검속 섯알오름사건 행방불명족회를 결성하는 계기가 되었음. 한편 신원확인을 못한 수많은 유가족들은 하루 속히 DNA 검사가 이루어지길 애타게 기다리며 국가에 대한 원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3.시신수습 및 유해 발굴과 안장 <1차> 1959년 8월 20일 새벽 섯알오름 근처에서 소를 관리하던 대정읍 상모리 거주 유계돌씨가 학살현장을 목격하고 바다로 고기잡이 가던 상모리 이경익씨와 정공심씨에게 집단학살 사실을 알리자 이두분에 의해 유가족들에게 비보가 전해 졌으며 전갈을 받은 300여명 유족들이 학살현장에 집결하여 시신 27구를 수습할무렵 경찰들이 공포를 쏘며 무력적으로 해산을 유도하자 겁에 질린 유족들은 울분을 토하며 수습했던 시신을 구덩이에 원상태로 회복시키고 해산했다 <2차> 유족들은 상시 경찰의 감시와 연좌제에 의해 입신양명의 길이 막힌체 절치부심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중 만벵디 유족들은 1956년 3월 30일(음력 2월 19일) 새벽을 이용60구의 유해를 발굴 만벵디 공동장지에 안장 했다. 이 소식을 잔해들은 백조일손유족들이 4월 28일 학살 현장에서 유해 발굴을 시도하였으나 무장군경의 저지로 또다시 실패했다 <3차> 그후 유족들의 관계당국에 꾸준한 탄원과 청원에 의해 유해 발굴이 허용되자 동년 5월 18일시신이 수장된 물웅덩이에서 양수기 (상모리 좌용진 소유)로 물을 퍼내어149구의 유해를 발굴하였으며 구중 치아와 옷 유품 등으로 신원이 확인된 17구는 각자의 묘지로 옮겨지고 자타식별이 되지 않은 유 해는 준비된 칠성판위에 머리뼈, 팔뼈, 다리뼈를 132구를 구성하여 대정읍 상모리 586-1번지에 안장하고 백조일손지지라 명명 했다. 한편 1961년 고철수집상들이 섯알오름 학살터 만벵디 회생자발굴 장소 인근에서 작업도중 우연히 당시 희생자로 추정되는 유해 2구를 발굴하게 되자 그들은 정중히 예를 갖추어 섯알오름 남사면에 매장했다고 증언하고있음 (고증자: 도의회 부의장). 3.통계 (1)면별 희생자 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