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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서 주도하기로 결의하고 '명일 쌀안장터로 모두 나와서 다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불러주시기 바랍니다'라는 통문 3통을 작성하여 이상옥외 2명을 시켜서 미원면과 낭성면 일원에 사발통문을 돌여서 그 익일인 31일 미원낭성 전역에서 운집한 다수(약 1천여명) 군중을 합세하여 쌀안장터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높이 외쳐 독립운동의 기치를 드높이고 이어 기세충천한 군중은 미원헌병주재소를 습격하여 왜경의 간담을 서늘케하는 의거를 감행하였다. 황급한 일주재관헌은 사태를 감당하지못하고 화급히 청주헌병대로 연락을 취하여 급파한 기마헌병의 지원을 받아 군중에게 무차별총격을 가하여 해산을 당하였다. 이때에 현장에서 총을 맞은 장일환은 즉사하고 이병선은 귀가사망하였으며 정무섭은 귀가 가료하였으나 실완하였고 김재형 신경구 김기원 이승호 이술찬 신학구 이용실 김진환 신성휴 서정식 윤인보 제씨는 이 의거로 인하여 피체되여 옥고를 격었으며 박우동 이상옥은 천신으로 피신하여 항일운동을 지속하였다. 공은 바로 왜경에 체포되여 일제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재판을 받아 청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고 석박되였다. 귀향한 공은 지속 항일독립정신을 불굴견지하면서 매서운 왜경의 감찰과 가혹한 왜정의 압제를 받아가면서 소농으로 인고한 생활을 하면서도 일편단심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심신을 바쳐 노력하던중 천우신조 연합군의 힘에 의하여 을유년 8월 조국광복을 맞았다. 건국초기 임정요인의 초청을 받아 서울에 상경한 공은 동지들의 출세권고를 고사하고 귀향하여 국가발전을 기대하며 무농하던중 공은 1946년 4월 26일 향년 66세에 애헉한 천년을 마치시니 오호통재라!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심신을 바쳐오신 공이 정부수립의 영광을 못보고 가신님의 혼백을 영령시킬수 없음이 한스럽도다. 손자인 달근의 노력으로 1990년 8월 15일 광복절에 정부로부터 대한민국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아 공의 혁혁한 공훈을 인정받아 영예로 여기며 금반 정부보훈처와 청원군수 지원으로 공의 생전사적을 묘비에 각명하여 자손에게 효칙을 권하고 세인귀감을 삼고조 손달근의 비문요청을 사양하다 못하여 천학된 이몸이 충북도지와 공의 재판기록을 참고하여 대략을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