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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께서는 한일합방 후, 조선총독부의 감시 때문에 도저히 독립운동을 할 수가 없게 되자, 그 이듬해에 모든 사업을 접고 온 가족을 데리고 延吉로 이주하셨다. 거기에서 재차 사업수완을 발휘하셨는데, 대규모 농장 운영과 농산물 생산 유통업 및 延吉 局子街에서 냉면 음식점을 운영하셨다. 동시에 항일 운동 연락책을 지속하고, 간민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셨으며, 북간도교육단 재무 담당과 북간도 독립당 재정책임자의 중책을 맡아, 당시 이상설, 이동녕 선생들의 독립 활동에 거액을 지원하는 등, 항일 운동을 다방면으로 지속하셨다. 또한, 당시 여성을 위한 학교와 교육이 부족하던 시절이라 공부할 기회가 없었던, 在만주 교포 여학생들을 위하여, 1912년 吉新女子學校라는 최초의 민족여학교를 설립, 운영하셨다.
公께서는 20여 년간 延吉에서 독립운동을 하시고, 맏아들 一韓이 유한양행을 창립후, 1929년에 평양 집(평양시 상수리 9번지)으로 돌아와 여생을 계시다가, 74세로 영면하시어 평양기독교묘지에 안장되셨다. 부인 김기복 여사는 서울로 이주하여 맏아들과 부천군 소사읍 항리 1번지에 1935년 건립한 2층 벽돌집에 살다가 1958년 86세의 일기를 다 하셨다.
公의 훌륭한 개화입국론에 기초한 자식 교육으로, 나머지 세 아들과 두 딸도 나라와 사회를 위한 헌신에 앞장선 애국애족의 모범이었다. 셋째 柳明韓은 유일한 박사의 독립운동 시, 유한양행의 제2대 사장으로서 일제 탄압을 견뎌내며 회사를 지켰고, 중국 동남아로의 사세 확장, 한국제약협회장 봉직 및 당시 국내 최고 최대 출판사인 고려인쇄사를 창업 운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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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柳東韓은 戰後 당시 크라이슬러 자동차 조립 생산기업인 유한 계열사 코리안모터스의 책임자이며, 우리나라 최초 최고의 자동차 엔지니어로서 우리 자동차 산업발전에 초석을 다진 석학이며, 국내 최초의 사진식자업도 도입한 엘리트였다. 막내 柳特韓은 유한양행 사장과 당시 제약업계 2위인 유유제약 사장으로서, 많은 신제품 개발과 사세를 확장시킨 주역으로, 한국제약협회장 역임 및 유유문화재단을 만들어, 불우한 학생들에게 장학금 지급과 사회적 가치를 실천해 온 제약업계의 영웅이다. 장녀 선형은 아버지의 독립운동 자금 연락책을 도맡아 한 장본인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손발이 되었으며, 셋째 딸 순한은 간호사로 서울대병원과 국립의료원 간호과장으로 근무 및 중요한 사회봉사들을 실천하여, 한국인 최초로 나이팅게일 기장을 받은 우리나라 간호계의 최고 상징이다.
<b>우리 가문의 스승, 예천의 선구자</b>
基淵公의 이러한 우리 사회에 귀감이 되는 훌륭한 가치관은 나라와 남을 위해 돈을 쓸 때에는 아낌없이 쓰고, 생활에는 철저하게 절약하는 선비정신에서 나온 바, 대표적으로 대동강 물도 필요한 만큼만 떠서 마시라고 가르치셨다. 유일한 박사는 아버지에게서 배운 국가관과 사회관, 독립정신과 탁월한 사업 수완까지 그대로 이어받아, 훗날 독립운동과 교육 사업에 매진하였고, 우리 재계에서 최초 최고의 모범기업인으로 사업보국까지 함으로써, 이 모든 부친의 행적과 삶을 재현하였다.
이에 우리 晉州柳氏 후손들은 先祖이며 우리 지역 名士이신 公의 이런 가르침을 이어받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훌륭한 공적과 사상을 이 碑에 담아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한다.
柳炳斗謹書(宰臣公派 宗中 회장, 小宗孫) 晉州柳氏 宰臣公派 宗中謹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