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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갑은 1930년 3월 마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 갔다. 1931년 귀국하여 김해군 장유금융조합 서기를 5년간 근무하였으며, 이 때 1934년 오성은과 결혼. 1937년 4월 부터 1941년 까지 서울연희전문학교를 수학하였다.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건에 연루되어 정학처분을 받기도 했다. 1941년 3월 일본 동지사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여 1943년 졸업하였으며 귀국 후 목사가 되었다. 1945년 광복 후 11월 부터 경상남도 교육양성소에서 교육생을 1기 부터 4기 까지 배출하였다. 부산대학교(현 국립부산대학 전신)를 설립, 교수로 지내다 1946년 8월 농촌사회 개혁으로 민족중흥을 앞당기려는 신념으로 암울한 현실의 농촌인 진영읍으로 왔다. 1946는 8월 15일 ‘진영복임 중등 공민학교’의 설립인가를 받아 진영대흥국민학교의 가교사(假校舍)를 빌려 8월 20일 부터 야간학교의 설립자 겸 교장으로 문을 열었다. 10월에는 진영리 철하마을의 일본인 소유였던 주택과 창고를 교사로 개조하여 주야간 2부제 수업을 하였다. 이 때 1947년 6월 21일 재단법인 3.1 학원 설립인가를 받았다. 1947년 8월에 부산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였다. 1948년 1월 26일자로 재단법인 3.1 학원의 한얼초급중학교 설립인가를 받고 9월에 진영읍 진영리 철하마을에 학교부지 3,500평을 매입하여 향토의 중등교육 요람인 한얼중학교를 창설하였다. 목사 강성갑은 한국이 낳은 기독교 참 지도자요, 진정한 민족의 향토교육의 교육자이자 선각자였다. 그러나 1950년 8월 2일 동족상잔의 6.25 전쟁으로 8월 2일 밤 낙동강 수산교 아래에서 공산주의자란 누명을 안고 38세의 젊은 나이로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동족의 총부리에 죽고 말았다. 출처 : 김해시 사)가야문화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