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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의 삶과 죽음 4.19혁명으로 친미매국을 위한 독재정권인 자유당이 무너지고 그 수괴인 이승 만이 미국으로 망명하자 이 땅에서는 그동안 억눌렸던 통일운동이 거세차게 일 어났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만나자 판문점에서”의 구호가 말해주듯 남 북이 곧 대화가 이루어질 것 같은 정세가 도래하자 역도 박정희는 무력으로 헌정 사를 짓밟고 군사 독재의 서막을 열었다. 이에 애국통일열사들이 항거하여 가열 찬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중에도 지하에서 조직을 꾸리고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 하여 투쟁하였던‘인민혁명당’이 있었다. 동지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제일은행 본점에서 근무하던 중 이 조직에서 연락을 담당하였다. 동지는 남달리 통일에 대한 열망이 드높고 의지도 굳세며 투지도 강하였다. 그러한 여러 자질들이 노출에 대한 위험도가 상대적으 로 높은 연락 거점을 맡게 됨에도 보안과 기밀유지에 대한 신뢰도가 높기 때문이 었다. 특히 조직의 최고 책임자였던 도예종의 비밀거소를 혼자서만 알고 중간연 락을 교통하고 있었다. 도예종은 ’60년 당시 민족자주통일협의회의 조직 간사장 으로 맹활약을 하다가 박정희의 쿠데타로 검거선풍이 불어닥치자 잠적하게 되었 고 전체 통일운동 단체들을 통일적으로 지휘할 당의 필요성을 느끼고 지하조직 을 꾸릴 데 대한 활동을 개시하였다. ’62년부터 박정희는 일본과 굴욕적인 외교를 벌이면서 불평등한 한일경제협약 을 맺으려 들었고 전국의 애국학생들이 들고일어나 데모에 돌입했다. 그러자 박 정희는 6월 3일, 서울에 비상게엄령을 선포하고 발악적인 무단정치에 돌입하였 다. 대학생들을 연행하고 학원규제법을 만들어 학원의 자유를 유린했으며 언론 규제법을 만들어 국민의 알 권리를 박탈하였다. 이에 도예종도 검거하기 위해 추 적하던 중 동지를 연행하기에 이르렀다. 동지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연행되어 갖 은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도예종의 비밀거소를 사수해야한다는 일념으로 내 한 몸 희생하면 되겠다는 각오를 굳히고 이층 창문으로 돌진하여 낙상하여 경추 3과 4가 골절되고 중추신경의 손상을 입고 전신마비의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이후 병원으로 옮겨 5년간 투병하다가 운명하고 말았다. 끝내살리라 |71| 이상배(당시36세) 범어사 앞 부산시립공원묘지에 안장 1935년 8월 6일 출생 1970년 6월 9일 운명 |70|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박정희정권 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