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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약하였다. 공은 먼저 사재를 내어 거사에 필요한 출자를 하는 한편 대전리 본집에서 격문과 태극기를 만들어 각 마을에 돌리고 약속된 3월 22일 청하장날 오후 1시를 기해 장터에 모여든 수백 군중과 합세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대기를 들고 선두에서 독립시위를 이끌고 나가매 시위군중은 더욱 늘어났고 항쟁의 함성은 그칠줄 몰랐다. 이날의 독립항쟁은 포항경찰서와 흥해 헌병분견대 등 일제 관헌의 무력 저지로 시위군중이 패산되고 공은 여러 동지와 함께 왜경에 의해 붙잡혀갔다. 온갖 고문과 유혹이 있었으나 끝내 의연한 자세로 일관하다가 드디어 대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위반이란 명목으로 1년의 징역을 언도받고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어 갖은 옥고를 치렀다. 만기 출옥한 공은 고향마을에서 대전리를 비롯한 일곱곳의 교회를 배경삼아 청년회를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으며 항일운동을 계속해나갔다.
1923년 공은 일제의 감시와 압박이 날로 극심해지자 더 이상 고향에 머물러 활동할 수 없음을 깨닫고 왜경의 눈을 피해 벽촌인 경북 달성군 가창면으로 들어가 여러 골짝을 전전하면서 이발 행상과 엿장수를 가장하여 주민들에게 암암리에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는데 이것이 왜경에게 발각되매 부득이 가창면 냉천동에 이주 정착하여 은거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만주땅으로 망명하여 항왜하던 친동생 준업이 일제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비보에 접하고 또 연이어 조카 희모가 부모의 원수를 갚고자 광복군에서 활약하다가 18세의 어린 나이로 전사했다는 소식을 받은 공은 그후 줄곧 취약한 몸으로 나날을 보냈다.
임견 세월 속에 광복은 맞이하였으나 이미 고향에는 공이 몸 둘 한 치의 땅도 없었다. 냉천골에서 잔신을 이끌고 신앙생활에 전념하다가 이윽고 세상을 뜨니 때는 1970년 6월 20일 향년 75였다. 1983년 8월 31일 건국공로 대통령표장이 내려졌다. 오늘 국가유공자 묘역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나라에서 지원하여 순국지사의 묘비를 세우게 됨에 공의 장손이 독립운동 사료를 불녕에게 보이며 새길 글을 청하매 공의 행적을 기린 나머지 무사를 무릅쓰고 몇 줄 적는다. 명하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