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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李庭禧) 지사(志士)의 자는 내길(乃吉)이요 호는 매운(梅雲)이며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좌의정을 지내신 양헌공(襄憲公) 용헌(容軒) 원(原)의 후예로 부(父)는 의선(宜善)이다. 지사가 출생했을 당시는 우리나라가 개항 직후로서 서구열강과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침략의 손길을 뻗치던 때였다. 이처럼 불우한 시대에 태어난 지사는 일제를 몰아내고 주권을 회복하고 근대적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일생을 바쳤다. 지사는 1881년(신사년) 1월 22일 경북 칠곡군 인동면 신곡리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3세에 부친을 여의고 외조부 장의원(張義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고향인 청도군 매전면 온막동(명대)으로 이사하였으며 8세에 이미 시서에도 조예가 깊어 명성이 높았으며 시대조류에 적응코자 대구광명학교에 진학, 신학문에 전념하였다. 일제는 서서히 한국을 식민화 해 갔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성장하면서 직접 체험하시게 된 지사께서는 점차 민족의식이 싹 터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친족이신 이상룡(李相龍)(임정 초대 국무령)과 박상진(朴尙鎭)(후일 광복회 총사령)을 만나 국권회복을 논의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직접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지사는 그 후 구국방략의 일환으로 동지들과 함께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의 거점을 확보하였으며 한미흥업회사를 설립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는 데에도 노력을 경주하였다. 한편 지사는 안희제(安熙濟)의 백산(白山)상회를 지원하기도 하고 대한광복회를 조직하는데 있어서도 탁월한 식견과 포부를 가지고 관후인자(寬厚仁慈)한 성품으로 동지 간에 융화와 단결에 독특한 역량을 발휘하였으며 지조가 결백 견고함으로써 일단 목적하는 바는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며 매진하는 굳은 투지와 정열로써 기필코 관철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책임자의 일인으로서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지사는 청도청년회장에 추대되기도 하였으며 군자금을 염출하기 위해 광업소도 설치한 바 있었다. 1919년에는 대한광복회 독립운동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공주감옥에서 8개월여의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그 후 지사는 월남 이상재(月南 李尙在) 백은 유진태(白隱 兪鎭泰) 윤치소(尹致昭)가 주관하는 조선교육회 조직에 참여함과 동시 온명(溫明)학원을 창립(현 매전초등학교) 원장에 취임, 교사 1명을 채용, 사비로 급여하고 후진 청소년 자제를 교육시키며 만주와 중국의 이상룡(李相龍) 김좌진(金佐鎭) 노백린(盧伯麟) 등과 연락을 취하여 의용단 군자금을 조달하고자 노력 중 체포되어 다시 대구감옥에서 3년 8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사는 석방된 후에도 단념하지 않고 원한경(元漢慶 미국인 언더우드)과 국제정세를 논의하는 등 동지들과 함께 재기를 꾸준히 논의하였으며 그러던 중 1945년 광복되자 광복회를 재조직하여 회장을 맡아 활동을 재개하였다. 지사는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경북유림의 대표가 되어 환국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였으며 반공반탁운동을 전개, 신탁반대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또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고문을 역임하였다. 매운 지사는 조선후기 외세가 조국을 침략하던 불우한 시기에 태어났지만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일생을 바쳐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 후 조국은 광복이 되었으나 그가 원하던 근대적인 민족국가의 건설은 보지 못한 채 1955년 향년 75세로 생애를 끝마치고 말았다. 이에 대한민국정부는 지사의 위공을 기리기 위하여 건국공로훈장(애국장)을 내렸다. 그의 슬하에는 후기(厚基) 광기(廣基) 하기(夏基) 양기(陽基) 등 4형제가 있으며 손자로는 종신(鍾信) 종세(鍾世) 종소(鍾昭) 종해(鍾諧) 종진(鍾振) 종인(鍾仁) 종순(鍾淳)이 있으니 모두 선친과 조부의 독립정신 및 유지를 받들고 있는 훌륭한 후예들이다. 매운 애국지사는 청도가 배출한 의인(義人)으로서 오직 나라를 찾는 독립운동과 국난극복에 몸을 바친 어른이시다. 이에 지사께서 서거하신지 반세기를 맞이하여 지사의 구국정신과 공적을 선양하기 위하여 유서 깊은 이곳 버드실 군자정 앞 선산기슭에 추모비와 흉상을 세워 영원토록 전하고자 한다. 2007년(정해) 3월 독립기념관이사장 윤경빈(尹慶彬)은 글을 짓고 후손 원희(元羲)는 글씨를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