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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애국지사 최정학 선생(1896~1964) 최정학(호 추계)은 1896년 의령군 부림면 신반리 329에서 태어났다. 선령읍 및 부림, 신우리 독립만세시위 주동인물로서 활약하고 1919.7.15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 받고 서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고인은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의령장터 3.1독립운동 만세시위〉 1919년 3월 14일 의령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월 3일 서울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구여순으로부터 서울의 소식을 전해들은 최정학은 구여순과 함께 이곳의 청년 유지 정용식.이우식.김봉연 등과 의령읍 장날인 3월 14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최정학과 구여순은 당시 용덕면 면장인 강제형에게 의거 계획을 설명하고 독립선언서의 등사를 부탁하여 그의 협조로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하여 수백 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한편, 최정학 구여순 등 주동 인물들은 주변에 널리 손을 뻗어 동지들을 규합하고 지역민들과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들에게도 이 계획을 알려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3월 14일 오후 1시경 의령장터에서 최정학을 비롯한 주동자들은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시위 군중의 선봉에 서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일제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 3백여 명이 가세하였고, 인근의 주민들이 계속 모여들어 시위군중은 점차 3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군중은 장터와 읍내를 시위행진하고 경찰서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외치고 자진 해산하였다. 이튿날인 15일 다시 의령향교 앞에 모인 1천 5백여 명의 시위군중은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경찰서와 군청을 시위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화경.이원경.최숙자.강순이 등의 주동 하에 여성들도 궐기하였다. 그러나 이때 마산 주둔 일본군 포병대대에서 응원 출동한 8명의 일본군과 현지의 일본 경찰이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 군중을 위협하여 해산시키고,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최정학도 이때 체포되었다. 〈신반장터 3.1독립운동 만세시위〉 의령장터에서의 만세시위를 주도한 최정학은 의령군 부림면 신반리의 만세시위를 전개하도록 정주성에게 등사한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정주성은 최한규.장용환.황상환 등과 함게 협의한 끝에 1919년 3월 15일 정오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3월 15일 12시경에 많은 군중이 신반장터에 집합하였다. 주요 인사들은 장꾼 차림으로 태극기를 숨기고 군중들 속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재빨리 태극기를 나눠주고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이에 모인 군중들도 일제히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급보를 받은 의령경찰서에서 경찰이 출동하여 총검을 휘두르면서 군중들을 해산시키고 중심인물을 검거하였다. 정주성.황상환.최한규.장용한 등은 체포되어 10개월 형을, 김용구는 6개월 형을, 최영렬은 태형 90대를, 박재선.박우백은 태형 60대를 언도 받았다. 그 외 권희환, 이동호 등이 신반리 의거에 참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