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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학(金鍾學)은 경기도 화성(華城) 사람으로, 1919년 4월 3일 장안면(長安面)·우정면(雨汀面)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일대의 독립만세시위는 차희식(車喜植)·차병혁(車炳爀) 등이 장안면 석포리(石浦里) 이장 차병한(車炳漢), 그리고 장제덕(張濟悳)·장소진(張韶鎭)·이영쇠(李永釗) 등과 계획하여 전개하였다. 2천여 명의 시위군중은 조암(朝岩) 장터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앞세워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안면 사무소로 행진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여기에 참여하기 위하여 장안면 사무소로 달려갔으나, 시위군중은 이미 면장 김현묵(金賢默)을 앞세우고 쌍봉산(雙峯山)에 올라가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그는 다시 쌍봉산으로 달려가던 중, 우정면 사무소로 가기 위하여 내려오던 시위군중과 합류하여 면사무소로 행진하였다. 그곳에 도착하여 선두에 나서서 서류를 끄집어내어 불태우고, 투석으로 면사무소 건물을 파괴하였다. 오후 5시경 시위군중과 함께 몽둥이를 가지고 화수리(花樹里)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여, 공포를 쏘며 대항하는 일본 경찰과 투석전을 벌여 일본인 순사 천단풍태랑(川端豊太郞)을 죽이고, 주재소를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며, 1920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소요·살인·방화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