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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려왔다 이후 프랑스령 인도지나 베트남 전선으로 되어 가던 열차. ( ) 에서 뛰어내렸다. 학병에 끌려간 장남이 해방이 돼도 돌아오지 않아 가슴앓이하던 이 미순 가명 은 꿈결에 아들 윤신이의 어머니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 " " . 런데 그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소를 잡아 마을 잔치를 벌였. 다 년 월 일이었다. 1946 5 8 . 김윤신의 귀국이 늦어진 것은 베트남전선에서 탈출한 그가 중국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천석꾼의 외동아들이었던 김윤. 신은 보성전문 고려대학교의 전신 에 입학해 마을의 자랑이었다( ) . 그는 학병에서 돌아와 보성전문으로 복학하지 않고 성악이 하고 싶 어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편입학했다 졸업을 앞둔 그는 임시로 장. 성여고 음악 교사를 맡았다 김윤신의 여동생 김묘신은 일제강점기에 . 아사히 고등여학교 전남여고의 전신 를 졸업하고 장성군 삼서초등( ) ( )旭 학교 분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그녀는 이화여대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집안의 반대로 상급학교에 진 학하지 못했다 그러다 서울공대를 졸업하고 포항에서 직장생활을 하. 던 전북 고창 출신의 양조장 집 아들과 결혼 날짜를 잡았다 년 . 1950 월 일이었다7 14 . 여동생 결혼식 준비 때문에 시골인 장성군 삼서면 대도리에 와 있던 김윤신은 그날 오후 전쟁이 터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년 . 1950 월 일이다 김묘신의 결혼식은 자동 연기되었고 두 남매의 삶은 6 25 . 이때부터 극적인 변화를 맞았다. 오빠는 선전부장 여동생은 여맹위원장, 자네들은 대표적인 반동 집안이지만 특별히 배려해서 우리와 함께 " 일하기로 했네 라며 김윤신의 친구이기도 한 삼서면당 위원장 나철" 주가 마치 큰 인심이나 쓰는 것처럼 말했다. 김윤신 동무를 삼서면 당 선전부장에 김묘신 동무를 삼서면 여맹" ( ) , ( ) 위원장에 임명하오 김영택 한국전쟁과 함평양민학살." ( , < >) 위원장 동무 저 애는 결혼 날짜까지 받아 놓고 있으니 나만 일하" . , 면 안 되겠소 안 되오 김윤신의 건의에 삼서면당 위원장의 입장?" " . " 은 단호히 거절했다 김윤신 남매는 본의 아니게 인공시절 완장을 차. 게 되었다. 사실 김윤신 남매는 일천석 지주 집안의 자녀로 오빠는 성악가로 동, - 3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