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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명성황후 시해와 그것이 남긴 것 35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근현대의 정치외교사와 인물을 연구해왔으며, 청주대 · 충북대 · 경희대 등에서 강의 했 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연구위원, 보훈교육연구원 연구부장, 원광대 초빙교수, 국제한국사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대한민국역사와미래 아카데미 원장으로  있 다. 주요 저 · 역서로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2002), 『조선후기 외교의 주인공들』(공저, 2008), 『헤이그특사와 한국 독립운동』(공저, 2008), 『대한민국의 태 동』 (2015), 『나의 친구 윤봉길』(공역, 2017), 『고종평전 - 문명전환의 길목에서』(2021), 『고종과 대한제국 - 왕국과 민국 사이』(2022) 등이 있다. 필자 이민원 정 등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국모시해 에 대한 복수의 차원과 단발령 등의 개혁 정책에 대 한 반대의 입장에서 봉기한 이들을 ‘을미의병’이라 부른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남긴 것 19세기는 제국주의 시대였다. 산업혁명으로 전 세 계가 새로운 문명을 누리게 되었지만, 수많은 약소 국들이 강대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시련도 동반하 였다. 그중 조선의 운명에 결정적인 시련을 몰고 온 것은 청일전쟁이고, 그 여파로 맞은 비극적 사건이 ‘명성황후 시해’이다. 이 사건은 일본의 조선 침략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건으로 한국인에게 각인되어 왔다. 더 심각한 것 은 일본에 의한 한국근대사와 인물의 왜곡이다. 일 본 측이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범죄에 관련된 일본 의 군민 모두를 무죄 방면한 결과, 누명을 쓴 것이 대원 군과 훈련대이다. 많은 일본인 작가들은 대원군과 왕후의 다툼이 조 선 멸망의 원인이라고 꼬집었다. 늘 음모가 난무하 는 중세적 왕조의 궁중 갈등이 민족성에 기인한다고 도 하였다. 기쿠치 겐죠[菊池謙襄]의 『대원군전(大院 君傳) 부(附) 조선왕비의 일생』, 『근대조선사』, 『조선 잡기』,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의 『민후조락 사건(閔后凋落事件)』 등이 모두 그러하다. ‘헬 조선!’ 식 한국사 인식의 뿌리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초선 진국 반열에 위치한 21세기의 한국, 이제는 그런 부 정적 인식을 버리고 미래로 향할 때가 아닌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一, 1865~1945, 당시 주조선 일본 영사관보)가 사건 다음 날인  10월 9일 왕후 살해 사실을 기록해 비밀리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월간조선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