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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조선의용대의 한국광복군 합류 35 조선의용대의 한국광복군 합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제적 위상 및 외교역량의 강화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단일 지휘체계 아래 결속된 통일무력을 거느리고 있음 으로써 임시정부의 대외적 위상은 훨씬 높아졌다. 그에 따라 중국정부 나 여타 연합국 정부들에 대한 발언 권이 강화될 수 있었다. 특히 1943 년에는 조선의용대 출신 대원들을 선발대로 한 광복군 인면전구(印緬 戰區)공작대를 파견하여 영국군과 공동작전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광 복군과 임시정부의 위상을 드높였 다. 1942년 조선의용대의 한국광복 군 합류는 관내지역 무장단체의 군 사통합에서 더나아가 임시정부가 연합전선정부로 발전하는 정치통합 을 이루는데 중요한 촉진제로 작용 하였다. 조선의용대의 합류 배경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중국 관내(關內) 최초의 한인 군사조직으 로 창설된 이래 활발한 대적(對敵) 활동을 통해 강력한 무장세력으로 성 장하고 있었다. 1940년 2월 현재 대원수가 314명에 이르렀던 조선의 용대는 대원들의 화북(華北)지방 진출을 계기로 그 세력이 양분되었다. 조선의용대는 이미 1941년 3월 중순부터 5월 하순에 걸쳐 김원봉(金 元鳳)을 비롯한 대본부 인원과 일선 공작원을 제외한 대원 80%가 황하 (黃河)를 건너 화북의 중국공산당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화북으로 진출 한 대원들은 1941년 7월 박효삼을 지대장으로 한 조선의용대 화북지 대로 재편되었다.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대본부는 충칭(重慶)에 잔류하 였다. 김원봉은 김두봉을 통해 의용대에 대한 지도력을 보다 강화하고자 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 간부이며 김원봉과 매우 친밀하였던 김두봉이 1941년 가을 충칭을 출발하여 1942년 4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활 동하고 있던 태항산(太行山)에 도착하였다. 화북지대는 점차 무정 · 최창 익 등이 조직한 화북조선청년 연합회와 더 긴밀한 연계를 가 졌다. 1942년 7월 화북조선청 년연합회가 조선독립동맹으 로 발전하면서 조선의용대 화 북지대는 조선독립동맹의 산 하 군사조직인 조선의용군으 로 흡수 편성되었다. 그럼으로 써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충 칭 대본부의 영향권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조선의용대의 화북진출 사 건은 중국관내 독립운동세력 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 조선의용대 성립 3주년에 즈음하여 1941 년 10월 경 중국 국민정부 장제스(蔣介 石) 총통이 써준 축하 휘호 ‘자강불식’ (KRpia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