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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11 · 3학생독립운동의 전개와 의의 35 진, 실행해간 학생운동의 결정체였다. 전국의 각급 학교 학생들이 운동을 추 진하는 과정에 신간회 지회, 청년동맹 등 지역 사회운동 단체 인사들의 지원 도 있었다. 그러나 시위나 맹휴를 계 획하고 실행해 간 것은 학생이었다. 참여 학교도 전문학교, 고등보통학교, 실업학교, 보습학교, 각종학교, 보통 학교 등으로 전 학생층이 망라되었다. 학생들이 독립을 요구하는 활동이 전 국적인 현상이 되었던 것이다. 11 · 3학생독립운동은 학생운동사와 민족운동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학생이 중심이 된 3 · 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 동이며, 1920년대 학생운동과 민족운동 역량의 총결산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11 · 3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은 이후 1930년대 노동, 농민운동과 국외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는 11 · 3학생독립운동이 1930년대 민족운동의 연결고리로 역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1920년대와 30년대의 가교(架 橋)역할을 수행한 운동이었다. 일제강점기의 학생들은 우리 민족의 질곡을 직시하며 이의 해결방안을 고민하던 지성인이었다. 이들은 우리 민족운동사의 변곡점에서 주요한 동력으로 활동하는가 하면, 인적자원의 저 수지이기도 했다. 11 · 3학생독립운동은 이러한 학생의 민족적 역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활동이었다. 전국에 파급된 학생시위운동을 보도한 기사(동아일보, 1930.1.22) 필자 김성민 국민대학교 국사학과에서 『광주학생운동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가보훈처(현 국가보훈부)에서 근무했으며, 국민대학교 전임연구교수를 지냈다. 저서로 『양 기 탁-계몽운동에서 무장투쟁까지의 선도자』, 『의열투쟁의 화신, 나석주』 등이 있다. 학생운동 뿐 아니라 국내민족운동 전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1930년 1월 15일에 일어난 서울지역 남녀학 생 3천여 명 연합시위운동 보도기사(조선일보, 193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