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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충남지역 후기의병의 봉기와 일제의 탄압 35 지   역 교전한 의병수 사상자수 청양, 정산 785 68 논산, 은진, 연산, 노성, 강경  550 101 보령, 남포 405 79 공주 335 69 당진, 면천 150 32 천안, 성환, 목천 130 34 서천, 한산 130 12 태안, 안면도 130 39 부여, 임천 127 15 해미 38 7 계 2,780명 456명 <표 2> 일본군과 교전한 충남 지역별 의병 수와 사상자수 위 표에 의하면, 1907년 9월부터 1909년까지 충 남지역에서 의병대가 일본군수비대와 16회, 헌병 분견소와 31회, 주재소와는 2회 모두 49회 충돌하 였다. 의병의 총수는 2,780명이고, 그중에 피살자 는 456명(이 중에 47명은 사상자)에 달했다. 연도 별로 보면, 1907년도는 천안과 목천 지역에서 의병 약 130명이 활동하여 그중에 34명이 피살되었다. 1908년도는 충남 지역에서 2,575명(전체의 92.6%) 의 의병이 참여했으며, 그 중에 399(전체의 87.5%) 명이 피살되었다. 1909년도는 태안, 남포, 청양, 연 산 지역에서 약 75명이 일본군수비대와 교전하여 그중에 24명이 피살되었다. 이로 보아 충남의병은 1908년 가장 활발했으며, 1909년 5월 이후는 쇠락 했음을 알 수 있다. 위 <표 1>을 참고로 하여 일본군과 교전한 의병수 와 사상자수를 충남의 시 · 군별로 보면 다음 <표 2> 와 같다. 위 표를 보면, 의병의 규모는 청양(정산)이 785 명 (전체의 28.2%)으로 가장 많으며, 논산(은진, 연산, 노성, 강경 등) 550명(20%), 보령(남포) 405명(15%), 공주 335명(12%)의 순이다. 이는 칠갑산과 오서산 등 산악지대에 있는 청양과 보령지역, 그리고 계룡 산 인근의 논산과 공주 지역에서 많은 교전이 있었 던 사실을 가리킨다. 그 다음에는 당진(면천)이 150 명, 그리고 천안(성환, 목천)과 서천(한산 포함), 태안 (안면도 포함)이 각기 130명, 부여(임천) 127명, 해 미 38명으로 나타난다. 한편 사상자수는 논산지역에 서 가장 많은 인원인 101명(전체의 22%)이 발생했 으며, 보령(79), 공주(69), 청양(68)에서도 많은 사상 자가 발생했다. 이 역시 산악지대에서 치열한 전투 가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다음으로는 태안(39) 과 천안(34), 당진(32), 부여(15), 서천(12), 해미(7)의 순이다. 충남지역 후기의병의 의의 후기의병기 충남의병의 주도층은 일부 양반 유생 이 있으나, 그보다는 농민, 상인, 광부, 해산 군인 등 이 오히려 많다. 의병은 지방 관청의 관아와 주재소 등을 습격했으며, 추격해 온 일본군 수비대, 헌병대, 경찰대와 굳세게 항전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군자금 을 확보하기 위해 세금영수원, 체송인(遞送人), 면장, 이장, 부농 집 등에 들어가 군자금을 요구하여 확보 하였다. 이 과정에서 비협조적이거나 밀고하는 자, 그리고 일진회원은 주요 공격 대상이었다. 후기의병기 충남의병은 중기의병과 달리 일정한 근거지를 확보할 수 없었다. 주로 산속에 근거지를 두고 비밀리에 활동하였다. 이에 따라 수십 명 단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