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page

Special Theme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영원한 주석 ’김구 35 감동하면서도, “독립은 만세만 불러서 되는 것이 아 니고 장래 일을 계획 진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 서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할 결심으로 상해로 망명한 것이다. 김구는 1919년 3월 29일 안악을 출발하여 중국 안동(현재 단동)에서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 쇼우(G. L. Shaw)가 운영하는 이륭양행(怡隆洋行)의 배를 타 고 4월 중순경 상해에 도착했다. 그는 곧 바로 임시 정부를 찾아갔다. 수립 초기의 임시정부는 국무총리 를 비롯한 각료가 아직 부임하지 않아 청년 차장들 이 내각을 운영하고 있었다. 임시정부가 제대로 작 동한 것은 안창호가 내무총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이다. 안창호는 미주동포들이 모아준 후원금을 가지 고 5월 25일 상해에 도착한 뒤, 6월 28일 내무총장 으로 취임하여 국무총리를 대리했다. 김구는 안창호를 찾아갔다. 안창호와는 여러 인연 이 많았다. 사적으로는 안창호의 여동생 안신호(安 信浩)와 혼인 얘기도 있었고, 공적으로는 신민회 시 절 뜻을 같이하는 동지이기도 했다. 그는 임시정부 의 문지기를 원했으나 안창호는 경무국장을 맡겼다. 경무국장은 내무총장의 통솔 아래 경찰업무와 도서 출판, 교민 보호와 위생에 관한 사항을 맡는 자리였 다. 또한 일제의 정탐활동을 방지하고, 밀정의 마수 가 어느 방면으로 침투해 들어오는가를 감시하는 업 무도 병행했다. 김구는 8월 12일 경무국장에 취임한 뒤 청년 경호 원들을 이끌고 교민 보호와 임시정부 수호에 앞장섰 다. 그래서 “감히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치안을 방해 하는 자가 없었으며, 동포의 생명과 재산을 협박하 던 강도배들은 머리를 감싸고 달아나는 쥐새끼들처 럼 그림자도 구경하지 못하게 되었다”고들 했다. 2 년여 동안 경무국장으로 소임을 다하며 김구는 임시 정부와 교민사회에서 두터운 신망을 얻었고, 입지도 단단해졌다. 그리하여 경무국장을 사임한 뒤 임시의 정원 의원으로 선임되고, 1922년 9월에는 내무부 수 장인 내무총장에 발탁되었다. 이제 임시정부의 지도 자 반열에 들어선 것이다. 임시정부의 지도자로서 김구가 빛나는 점은 ‘위기 에 강한 리더’라고 할 수 있다. 임시정부는 물론 독립 운동계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이를 극복해갔다. 1923 년 1월 상해에서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을 위한 국민대 표회의가 열렸지만, 임시정부의 존폐 문제를 둘러싸 고 개조파와 창조파로 나뉘어 분쟁이 일어났다. 심지어 윤해 · 김규식·신숙 등 창조파는 새로 ‘한’ 정부와 국민위원회를 발족하여 임시정부를 부정하 였다. 이에 내무총장으로 재임하던 김구는 6월 6일 내무부령 제1호를 발포하여 국민대표회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소위 국민대표회의에서 6월 2일 연호 및 국호를 정한 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모반이다.… 본 내무총장은 2천만 민족이 공동 위탁한 치안의 책 임과 4천년 유업의 신기를 보유할 직권으로서 소수 인의 집회 등 6월 2일 이래 일체의 불법행위를 엄금 하고 대표회 자체의 즉시 해산을 명한다.” 2천만 동 포와 반만년 역사의 이름으로 임시정부 폐지의 위기 를 극복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1925년 지도체제를 변경했다. 1925 년 3월 초대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탄핵 면직하고, 4 월 대통령제를 내각책임제인 국무령제로 바꾼 것이 다. 이어 행정수반으로 이상룡과 양기탁·안창호·홍 진을 국무령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이상룡은 조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