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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평안도, 3 · 1운동을 이끌다 35 70명이 넘는 참여자를 체포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편 4월 2일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에서는 하 나의 상징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삼하동에 거주 하는 김시항(金時恒) 등의 주도 하에 약 3천 명의 주 민들이 시위를 일으켜 옥상면사무소를 점거하고, 현 금과 비품을 몰수한 뒤 약 10여 일 간의 자치 사무를 결행한 것이다. 참고로 이 옥상면 3 · 1운동은 그 유명 한 3월 3일 황해도 수안군 만세운동과 4월 1일 경기 도 안성군 만세운동 등과 함께 3대 실력 항쟁 사례로 꼽히고 있다. 3 · 1운동을 주도한 평안도 이처럼 평안도지역은 민족대표의 3분의 1인 11명 을 배출하여 전국에서 가장 많은 민족대표를 배출한 곳이었고, 이들 민족대표를 중심으로 타지역보다 가 장 먼저 3 · 1운동을 일으킨 지역이었다. 또한 평안도 지역의 3 · 1운동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확산되었다 는 점에서 전국의 3 · 1운동을 견인한 측면이 있었다. 게다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의 탄압에 정면으 로 맞섰다는 점에서 그 상징성 역시 대단히 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히고 지금까지 평안도지 역 의 3 · 1운동, 더 나아가 한강 이북의 3 · 1운동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비교적 부족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 으나 분단의 현실이 아마 가장 중요한 이유였지 않 았나 생각한다. 이 같은 현실은 3 · 1운동 105주년을 맞이하여 우리에게 여러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3 · 1운동상(像)이 한강 이남에 한정된 것이었다는 것, 더 나아가 3 · 1운동은 앞으로 도 관심을 갖고 연구해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 등이 그것이다. 향후 3 · 1운동에 대한 연구가 더 진행되어 그 역사적 진실이 선명히 드러나는 날이 오기를 기 대하며 이 글을 마친다. 충북대학교 대학원에서 평안도지역 3 · 1운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 념관·국가보훈처에서 근무했고, 충북대학교 등에서 강의했다. 현재 충남도청 복 지보건국에 재직하고 있다. 「평안북도 의주지역의 3 · 1운동」, 「의병장 문태수의  의진 운영과 성격」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최근에는 대한제국기 국권회복운동과  의병, 일제강점기 3 · 1운동 등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다. 필자 이용철 사천시장 만세운동 소식을 보도한 『每日申報(매일신보)』(1919년 12월 5일자).「沙川憲兵殺害詳報(사천헌병살 해상보), 사천의 소요와 헌병 죽인 사건, 돌과 몽둥이로 네 명을 죽였다 헌병의 대항도 부득이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