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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정제 자는 성흠이요 호는 운파이시다. 공은 서기 1881년 3월 6일에 충남 보령군 주산면 주야리에서 출생하니 선계는 신라에 왕공 장상이며 조선조에 휘 한 호 우재공이 통훈대부 보좌 원훈공신으로 단종 선위에 은거 남포하고 그 15대손 휘 상우 자 인보 호 기천께서 도덕문장이 겸비하여 관지 성균박사공의 장자이니 어려서부터 엄친께 학덕을 전수받어 인격을 도야하시고 세태 파악에 남달리 현철명민하시였다. 공은 한말 국운이 쇠퇴하여 우국충정을 금할 수 없던 바 끝내 일제의 마수는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니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독립운동의 큰 뜻을 세워 국내에서 암약하다가 기미 3.1독립만세 당시 계씨 휘 량제공이 주렴산 만세 선봉자로 모진 고문과 수형을 당하니 국내에서는 뜻을 펼 수 없다고 생각되어 계씨와 동행 암행으로 국경을 넘어 세찬 설적을 헤치며 북만주 일대는 물론 노령 블라디보스톡으로 동지들과 독립운동에 앞장 서서 때로 공공회의 일원으로 교민들과 상접하며 정보 수집 전달에 역무하였고 다음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밀령을 받고 국내의 군자금 조달책으로 수차 왕래하다가 서기 1922년 10월 동지 부여 은산 출신 박길화 김동진 및 문장섭 문경섭 등과 왜헌에 피체되여 심한 고문 끝에 보안법 위반 죄목으로 3년 언도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함흥감옥으로 이감되어 형자의 악전 고투 긑에 서기 1925년 10월에 출옥하여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싸늘한 고향을 잊은채 또다시 북만주로 밀경하여 옛 동지들과 힘을 합하여 독립운동 대열에 참여 왜놈들과 싸우다 꿈에도 그리고 외치던 감격의 조국광복과 더부러 계씨 량제공과 작별하고 환국하시었으나 연세 연만하시여 일절의 타 공직을 사양하시고 탁월한 인품과 학덕을 후진양성에 진력하시다. 그 거룩한 뜻을 펴시지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