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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에 고무된 그는 이강우·김재화·권채근·강달영. 박진환·박용근등의 동지와 비밀 회합을 거듭한 끝에 경남 진주에서도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맹약 결의하고 그 시일과 구체적인 거사방법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먼저 3월 10일경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작성하여 비밀리에 배포하는 한편 인근 각 면으로 동지 규합에 나섰다. 일제는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진주지방의 만세시위에 대비하여 경계를 더욱 삼엄히 하고 있던 중 이상한 기미를 눈치채고 각 학교에 휴교를 명하고 교사들로 하여금 학생들을 엄중 정탐하도록 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3월 18일 진주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거사방법으로는 진주를 3개구로 나누어 11시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봉기하기로 하였다. 그는 이날 정준교 등과 공원에서 만세시위를 개시하였다. 이로 인해 강상호는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출옥 후에도 진주 형평사조직을 주도하고 1924년 4월 25일 개최된 형평사 발기총회에서 임시의장 및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동년 8월 11일 개최된 진주노동공제회 집행위원회에서는 회계를 맡았다. 또한 이해 일본인 시미즈의 사기사건 해결을 위해 진주 시내 14개 단체의 발기로 시민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그는 실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신간회 진주지회에서는 간사와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사립 일신고등보통학교의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활발한 사회운동을 펼쳤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