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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우리 고장에서도 7지사가 주동이 되어 이천장날인 4월 2일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결행키로 모의 극비밀리에 사발통문으로 남녀노유를 이천장터로 동원하였으나 일제관헌들의 경계가 너무도 삼엄하여 장소를 신둔면사무소 앞으로 다시 변경하고 약 3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하여 독립선언서를 랑독하고 만세시위를 단행한 바 당시 내주하던 행인들까지도 동참하였으며 더우기 차내에 타고 있던 일본인까지도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으니 일대쾌사라 아니할 수 없다. 이로서 이천군내에서는 유일하게 우리 신둔면이 기미독립만세 시위를 하게 된 것이다. 시위가 노도와 같이 절정에 이르자 이에 당황한 일제헌병들이 출동함에 죽음을 무릅쓰고 적수공권으로 저항하였다. 그 익일부터 일제헌병들은 면내를 샅샅이 수색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검거한 후 곤장을 치고 불로 지지며 차마 인간으로서는 형언할 수 없는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다. 한편 주모 7지사는 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각기 처벌되었으며 대부분은 심한 고문과 옥고로 인하여 젊은 나이로 천추의 한을 남기고 호국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춘풍추우 66개 성상이 지나도록 엄연한 독립투쟁 의거사실이 알려지지 못한 것은 심히 유감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만시지감은 있으나 이제 이 의거사실을 오래 기념하고 후세 자손들에게 조상의 애국충절에 대한 얼을 계승케하기 위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이 기념비를 건립하는 바이다. 7위 지사 영령이시여 고이 잠드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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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명치유신 이래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의 군국주의로 급성장하여 마침내 청일 노일 전쟁에서 이김으로써 동양은 그들의 독무대가 되고 말았다. 한말에 우리 국운이 극도로 쇠약하고 수구와 개화의 국론이 분분함을 틈타서 대륙침략의 야욕을 품고 무력을 앞세워 온갖 위협을 다하야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마침내 우리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뿐만 않이라 외교권마저 박탈하고 심지어는 명성황후 민비를 시해하였고 급기야 1910년 경술에 이르러서는 우리 강토를 강제 병합하여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 사직은 일제식민지가 되고 말았으니 이 어찌 겨례의 비분을 말로다 형언할 수 있으랴. 기후 총독부를 두어 혹독한 무단정치로 민족 고유 문화의 말살과 경제적인 수탈을 자행하여 2천만 생령을 금수와 같이 다루었다. 또한 고종황제마저 독살하는 만행을 거듭하였음에 이르러 전국민의 원한과 울분은 터지고 말았다. 고종황제의 인산일이 3월 3일로 정해지자 1919년 기미월 1일을 기하여 손병희 선생을 비롯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랑독하고 탑동공원에 운집한 군중들은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웨치며 시위행진을 하자 이날의 의거는 요원의 불길처럼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확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