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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크게 떨쳤다. 28일 다시 격문하여 천도와 인도를 헤아리고 충의를 말하니 명정언순이라, 함경도 사람들이 격문을 읽고 울며 와서 호응했고, 인심도 크게 안정되었다. 회녕의 아전과 군사들이 반적 국경인 및 그 무리들의 목을 베어왔다. 선조에게 장계를 올렸다. 곧 이어 국세필의 목을 베고 또 장계를 올렸다. 선생은 호령이 엄숙하고 상벌이 분명했으므로, 감히 군법을 범하는 사람이 없었다. 10월 그믐에 길주 장평에서 왜적과 격전하여 적장 5명을 죽이고, 820여 명의 목을 베고, 말 180필을 얻었다. 왜적들이 생포해 가던 우리 백성 및 가축 무기 등을 탈환했다. 이에 원근에서 호응하여 의병이 7천 명에 이르렀다. 후세의 평하는 사람이, “임진왜란 중에 민중들을 충의로써 격려하여 온전히 승리하고 전란을 극복한 것은 농포에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다.”라고 했다. 12월 25일 선생은 길주성 주위에 복병을 설치해 놓고 림명으로 이동하여 수백 명을 목 베었다. 군성이 크게 떨쳤고, 왜적들은 더욱 두려워하였다. 그 때 임해군을 호종하여 왔던 윤탁연이 함경도 감사가 되어 왔다. 선생의 관직이 병사이면서 의병대장이라고 일컫는 것과 세운 전공이 자기보다 나은 것 등을 시기하여 조정에 아뢰면서, 선생을 무함하여 전공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는 억울한 일이 벌어졌다. 윤탁연이 의병대장직을 바꾸자, 선생은 6진을 순행하며 백성을 안정시키고 반당을 베고 오랑캐를 불러 개유하니 감히 다시 난리를 꾀하지 못하였다. 1593년 1월 9일 선생은 반적 국세필의 목을 벤 공만 인정되어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다. 정현룡이 의병대장의 역할을 못 하자, 선생을 다시 의병대장으로 삼았다. 22일 단천에서 수백 명의 왜적을 격파하였다. 크고 작은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을 정도로 탁월한 전술을 전개하였다. 2월 1일 가등청정이 의병에 포위된 길주의 왜적 부대를 구출하려고 스스로 2만명을 거느리고 마천령을 넘어 오자, 선생은 군사 3천명으로 그 뒤를 끊고 굳센 군사를 지휘하여 60여리를 싸우면서 백탑교에 이르러 대파한 후 영동까지 추격하였다. 이때부터 왜적이 다시는 함경도에 들어오지 못했다. 선생이 마침내 장평・임명・단천・백탑교의 4대첩과 6진을 진정한 공로를 기록하되, 모든 공을 장병들에게 차등 있게 돌리고 전혀 자신의 공로로는 삼지 않았다. 최배천을 행재소로 보내어 이러한 전공을 아뢰었더니, 선조가 접견하고서 눈물을 흘렸다. 선생의 대첩으로 함경도를 수복한 것은, 나중에 임진왜란을 승리로 끝내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1594년부터 영흥부사, 길주목사 등 직을 거쳤는데, 은혜와 위엄이 아울러 돋보였다. 어사가 치적을 아뢰자 선조가 옷감을 하사하였다. 선생이 떠난 뒤 백성들이 유애비를 세웠다. 함경도 평사로 부임한지 8년 만에 위대한 전공과 치적을 남겼다. 1597년 공주목사 재직 때 조정에서 지방의 진관제도를 마련하고 있었는데, 서애 유성룡이 선생의 통솔하는 것이 법도가 있음을 보고 선조 임금에게 아뢰어 군정을 정돈하게 하고 이를 본받게 하였다. 1599년 文科 중시에 장원하였다. 1601년 가선대부 례조참판에 제수되었다. 1610년 사은부사로 북경을 다녀왔는데, 연행시를 여러 수 지었다. 그 다음 해 남원부사에 임명되어 유학을 크게 일으켰다. 1612년 동계 정온, 석담 이윤우와 서로 왕래하며 학문을 토론하였다. 당시 이이첨 등 대북파가 심히 발호하였는데, 선생에게 동조할 것을 요청했으나 일체 응하지 않았다. 1618년 9월 창원부사로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그 다음해 봄에 성주로 한강 정구선생을 찾아가 경서와 예서를 강론하여 크게 칭허를 받았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선생을 원수로 등용하고자 했으나, 외직을 청하여 4월에 전주부윤에 임명되었다. 1624년 2월 이괄이 난을 일으켰는데, 조정에서 선생을 부총관에 임명하여 기복하려 하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했다. 10월 창원부사 당시에 지은 영사시 초회왕에서 잔손이 인조를 빗대고 정통성을 부정하였다는 명목으로 죄를 얽어 원통하게 옥사하니, 11월 19일이었다. 1625년 2월 의정부 송산 선영의 아래 유좌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선생의 일생은 충의로 기병하여 누란의 국가 위기를 극복하고 절조와 애민으로 탁월한 목민의 치적을 쌓았으며 효우를 중히 하고 심학고덕의 기풍을 널리 진작하였다. 1664년 이단하가 함경도 평사로 부임하여 전공을 수집하고 관찰사 민정중에게 보고하여 사당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1665년 이후 경성에 창렬사, 회령에 현충사, 부령에 숭렬사를 세워 모두 사액하고 국가에서 예관을 보내어 제사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