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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익봉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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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유례가 없는 참혹한 7년 대전란인 임진왜란 때 조선이 망하지 않은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의병의 활동이다. 많은 의병장 가운데 가장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인물이 바로 북충의남충무로 일컬어지는 충의공 농포 정문부 선생이다. 선생은 문무겸전한 걸출한 인물로 왜적의 손에 거의 망해가는 나라를 구출한 위대한 전공을 천추에 남겼으니, 우리 후인들은 선생의 위국충절을 길이 흠앙하면서 역사상의 훌륭한 스승으로 삼아 배워야 하겠다. 서원은 원래 학덕이 있는 선현들을 존숭하는 곳이다. 선생을 모신 사당 네 곳이 모두 함경도에 있고, 남한지역에는 선생을 향사하는 곳이 없었다. 위대한 선생에게 대한 전례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유론이 세차게 일어나자, 선생의 종손 규섭과 후손 구석 등이 유림과 후손들의 역량을 규합하여 마침내 후손들이 세거하는 진주 귀곡에 가호서원과 충의사를 창건하였다. 사액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1997년 남강댐 숭상공사로 현재의 용암리로 이전 확장하였다. 이때 대종친회의 도움과 후손 한재의 역할이 컸다. 후에 장판각, 유물관을 건립하였고, 2013년에는 북관대첩비 이모비와 국역비도 세웠다. 선생의 자는 자허, 호는 농포, 본관은 해주이다. 해주정씨는 고려 시중 휘숙을 시조로 삼는다. 조선조에 들어와 휘역은 대제학 좌찬성을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도이다. 고조는 통정대부 휘연경, 증조는 판서 휘희검, 조부는 참판 휘언각, 부친은 판서 휘신이다. 모친은 장사랑 김흥예의 따님이다. 1565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아주 총영하여 7세 때부터 시를 지었는데, 그 시가 문집에 남아 있다. 1585년 생원 진사에, 1588년 24세에 문과 갑과 2위로 급제하였다. 홍문관 수찬, 지제교, 사헌부 지평 등 직을 거쳐 1591년 7월 함경도 병마평사에 임명되었다. 1592년 4월 14일 왜적 20만 여명이 조선을 침략하여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와 6월에는 왜장 가등청정이 철령을 넘어 함경도로 침입해 들어왔다. 관군은 다 무너지고 고을 원들은 도망쳐 숨으니 함경도 전체가 왜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전란의 틈을 타고 여진족도 침략하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전 국경인, 국세필 등은 왕자 임해군, 순화군과 대신들을 잡아 왜적에게 바쳤다. 민심이 흉흉하였으나 누구 한 사람 지휘할 사람이 없었다. 선생은 7월에 창의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몇 달 뒤 경성의 유생 최배천,종성부사 정현룡 등 여러 사람들이 창의하고 선생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선생은 창의격문을 지어 함경도 백성들에게 충의로써 격려하니, 온 도의 사람들이 분기하였다. 9월 19일 길주의 왜적을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다. 첫 번째 승첩으로, 이때부터 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