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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이 함평에 진주했을 때 피난 가지 않았냐 는 기자의 질문에 " ?" 윤민용은 내 식구가 왔는데 피난을 왜 가 라며 반문했다 윤민용" , ?" . 과 남로당을 위시한 좌익진영 입장에서는 인민군이 해방군 이자 식' ' ' 구 였던 것이다 인공 시절 윤민용은 해보면인민위원회에서 토지 관' . 계 업무를 봤다 나기 전에 하던 일이었다 전쟁이 났다고 해서 . 6.25 . 면사무소 일이 크게 달라진 게 없었고 그의 업무도 마찬가지였다, . 윤민용이 생각한 해방 시절 다른 말로 합법 시절 또는 인공 시절( ' ' ' ' 이라고 한다 은 아주 잠깐이었다 군이 수복하면서 불갑산으로 쫓) . UN 기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불갑산에서 지프차를 타고 다녀 북한군 점령기 말에 해보분주소에서 보안업무를 본 윤민용은 년 1950 월 말 불갑산에 입산했다 해보면 생산유격대장에 취임한 그는 얼12 . 마 안 되어 불갑산 생산유격대장을 맡았다. 죽창을 든 그는 지프차를 타고 불갑산 곳곳을 다녔다 목포와 무안. , 나주 영광 장성 함평 등 각지에서 온 동지들과 피난민들이 군 면 , , , · 단위별로 움막을 치고 살았다 생산유격대는 치안을 확보하는 일을 . 맡았고 피난민들의 동향도 파악했다 그런데 불갑산에서 빨치산 활, . 동을 한 김영승은 생산유격대는 비무장 빨치산으로 주로 보급 투쟁" , 을 했다 고 한다" . 어쨌든 윤민용의 생산유격대장 역할도 오래가지 않았다 년 월 . 1951 2 일 군경의 토벌작전인 대보름작전 이 개시되었기 때문이다 군경20 ' ' . 의 인간사냥은 목불인견이었다 윤민용은 당시 산비탈에 시신이 즐비. 했다고 한다. "하여튼 그 고랑에 시신이 가득 찼응게 가득 찼고 그 보름날 작전 ( ) . . 그 뒤로 아침에 아까 말한 것 같이 중략 낭중에 석양이 되야서 나, ( ) 오다 보니까는 헉해 산이고 들판이고 산비얄 산비탈 이제 잉 헉해. ( ) . 요 죽은 사람들이. " 불갑산 생산유격대장 윤민용은 대원 명과 함께 해보면 산내리를 3 0 경유해 나주로 갔다 이 와중에 그는 가족을 잃었다 불갑지구사령부 , . . 문화부대원이었던 동생 윤주용 가명 과 큰형 윤선용 가명 을 잃었다( ) ( ) . 행방불명이라고 하지만 당시의 정황상 군경에게 처형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동생은 그렇다 치더라도 윤민용의 아내와 둘째 아들 당시 . ( 2 세 은 빨갱이 가족 이라는 이유로 년 월 초에 해보면 문장리 ) ' ' 1951 3 뒷산에서 경찰들에게 불법적인 죽임을 당했다. - 3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