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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가 되었다 당시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 시간 노동제. ' ' , '8 ' , ' 남녀평등권 을 주장한 조선공산당의 정강 정책은 민중들에게 폭넓은 ' · 지지를 받았다. 윤민용의 증언에 의하면 함평군 학교면사무소 직원과 학교 교사 대 부분이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고 한다 윤민용이 공무원 시험을 통해 . 년도부터 근무한 해보면사무소 분위기도 위와 다르지 않았다1947 . 무엇보다 해방 후 민중들이 사회주의와 조선공산당을 자연스럽게 수용한 데에는 일제강점기 말까지 변절하지 않고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한 세력이 사회주의자였다는 점일 것이다. 윤민용은 한국전쟁이 나기 전까지 함평경찰서와 해보지서에 차례5~6 연행되어 구금되었다 그만큼 그는 해방 후부터 한국전쟁기까지의 . 시기에 확고한 신념의 기치 아래 활동을 한 것이다. 내 식구가 왔는데 피난을 왜 가" ?" 함평을 경유해 목포로 후퇴하려던 담양경찰대는 인민군이 영광을 점령했다는 소식에 기겁했다 영광. 군 불갑면 삼학리에 살던 소년 김영승 년생 은 해거름에 삼학출장소로 들어가는 한 무리의 경(1935 ) 찰들을 보았다 담양경찰대가 후퇴하다가 밥을 해 먹기 위해 삼학출. 장소로 들어간 것이었다 경찰들이 쌀을 씻어 대형가마솥에 장작불을 . 땔 때였다. '슈웅 쾅 인민군들이 삼학출장소를 향해 로켓포와 박격포를 쏘았다', ' ' . 경찰들이 응사를 했지만 화력의 절대적인 열세였다 교전은 오래지 않. 아 담양경찰대의 일방적 패배로 종결되었다 년 월 일 밤이, . 1950 7 22 었다 인민군은 명이 전사한 데 반해 경찰은 여 명이 전사했다. 2 100 . 생존한 경찰들은 인근 마을로 피신하거나 도주하기에 급급했다 전사한 . 경찰들과 도주한 경찰들의 무기들이 삼학출장소 주변에 널려 있었다. 영광군 불갑면 삼학리 신성마을 청년들이 이 무기로 무장해 자위대 를 구성했다 또한 삼학출장소 경계에 있던 함평군 해보면 청년들도 . 무장을 했는데 인민군 점령시절에 생산유격대 윤민용의 증언 로 출, ( ) 범했다 진실화해위원회 년 유해 발굴 보고서 하지만 생산.( , <2009 >) 유격대는 후일 불갑산에 입산했을 때의 조직이고 인공시절에는 치안, 대나 자위대였을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함평군 해보면 보도연맹원 여 명은 함평군 나40 산면 구산리 넙태에서 학살당했다 년도에 국민보도연맹에 가입. 1949 된 윤민용은 당시 해보면사무소에 근무했다 그는 다행히 소집을 면. 해 죽음의 골짜기로 끌려가지 않았다. - 3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