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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역임하였다. 경숙국치를 당하자 관직을 버리고 일본의 폭정으로부터 자주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일념으로 경성부 권농동 184번지에 주하고 동대문구 숭인동 산기슭에 영이정 현 청용사경내에 칠성각을 건립하였다. 공은 이곳에서 은거하며 황실퇴역관리들과 고종황제 최측근 양반들의 모임이자 의친왕의 장인인 김사준이 회장인 란회원들과 수시로 회동하며 동지규합 및 독립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중에 국내에 잠입해있던 성낙형에 의해 신한혁명당당원으로 참여하였다. 신한혁명당은 1915년 중국 상해와 북경에 거주 독립운동자들의 연합으로 박은식 신규식 이상설 성낙성등이고 고종황제를 추대하여 중국 독일과 우호관계를 맺어 조선의 독립을 이루고자 하였다. 공운 변석붕과 경각서를 배포하고 독립전재을 준비하고자 중국정부와 한중의방조약 체결을 위하여 광무황제의 위임장을 받고자 활동하던중 황제알현직전에 체포되었다. 1915년 10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8월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귀향후 공은 일경의 감시를 받았지만 지절을 견지하다가 광복을 맞아서 이승만정부의 동참을 권유받았지만 조선왕조에 대한 충정과 절개로 이에 응하지 않았다. 1953년 정월 2일 향년 83세로 서거하여 남이면 석판리 산93번지 도장골 선영하에 배 선인 경주김씨와 쌍분안장하였다. 경주김씨는 1867년 정유 정월 24일생하여 1942년 임오6월 29일 졸하니 향년 75세이며 부덕이 있었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니 장남은 노연 차는 노학 노준 노후이요 녀는 전저인 이연호와 이명덕에 출가하고 손자는 상규 명규 문규 한규 성규 정규 해규 은규이고 증손 종은이하는 번불실록한다. 2000년 자손들이 정부문서기록보존소에서 찾은 공의 형사판결원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