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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의 이은규 선생을 비롯 김한식 김용구 한정종 지사와 함께 화천군 일원 주민에게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뜻을 설득 만세 시위군중을 규합하여 선봉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시기를 기다리던 중 1919년 3월 1일 거족적으로 전개된 민족운동인 독립만세를 계기로 화천군은 거사일을 동년 3월 23일로 내정하고 당일 화천면 하남면 상서면 주민 1000여명과 함께 읍내로 진입하다 직동 물레방아터에 이르러 한정종 지사가 이끄는 시위군중과 합세하여 그곳에서 1차로 독립선언문 낭독과 만세를 외치니 천지는 진동하고 산천초목이 화답하였고 지사께서는 다시 선봉에서 화천읍을 향하여 행진중 핑구고개에서 대기하던 왜병의 저지로 격렬한 공방 속에 총검을 헤치며 강행하려는 선생은 피체되었으니 교활한 헌병의 잔혹한 고문은 어찌 필설로 형언하리오 그러나 선생의 초지일관된 민족정신은 자주독립을 위한 평화적 시위의 정당성을 항변하며 침략과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대한남아의 장엄한 기개는 일편단심 구국의 혼을 불태움이니 일제의 경성복심법원에서 1919년 7월 7일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목불인견의 옥고로 득병 1938년 3월 16일 향년 47세를 일기로 한많은 조국의 광복을 못본채 타계하니 선생의 숭고한 얼은 후세에 면면히 계승되어 민족의 지표로 승화되리니 대한민국 정부는 그 공을 기려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으며 자손은 장자 윤서 차자 윤학이요 손은 관석이며 손녀는 명숙 명자 춘자 명화 명순 명애 명선 명란으로 후손이 번창하다. 서기 1992년 6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