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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의 애국계몽운동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뒤 지병인 안질로 인해 낙향하여 건강을 돌보면서 웅천교회에 출석하여 총각 집사로 임명받아 교회를 섬겼다. 주기철은 1917년 10월, 20세의 나이로 이기선 목사의 소개로 김해읍 교회에 출석하던 안갑수와 중매로 결혼하였다. 집안이 안정되고 병세가 호전된 주기철은 지역 민족운동가인 오상근과 함께 "웅천 청년 운동단"이란 단체를 만들어 시국강연회와 계몽활동을 하면서 민족계몽운동단체인 "교남학회"를 조직하고 그지역 청소년들을 상대로 계몽운동과 강연을 실시하였다. 주기철은 민족 계몽운동을 할 즈음 일제는 한국을 영구 식민지화하기 위해 화투·아편·창녀를 보급했다. 이러한 시도는 설움과 울분을 삭이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애국애족의 대열에 서서 일제를 향한 항일운동에 나서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해 젊은이들의 정기를 흐려놓고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으려 한 술책이었다. 이에 격분한 청년 주기철은 오산학교에서 배운 민족애를 바탕으로 일제의 이러한 만행에 울분을 삭이지 못하는 지역 청년들을 대상으로 계몽운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