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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025년 10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을미사변(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을 다시 본다’ 외교관의 질의에 응답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공사관 서기관 알렌(H. N. Allen)이 총소 리에 놀라 깬 것은 새벽 5시였다. 곧이어 이범진으로 부터 고종의 화급한 요청으로 러시아공사와 함께 서 둘러 입궐하였다. 그들은 광화문 앞에 이르러 산만한 복장의 칼찬 일본인들이 몰려 나오는 것을 목격하였 다. 입궐 후 상당시간 동안 미우라공사가 고종 및 대 원군과 함께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때 미우라는 훈련 대와 순검의 싸움을 막아달라는 고종의 요청으로 왔 더니 사태는 끝나 있었다고 위증(僞證)하였다. 알렌 등은 일본군, 영사경찰, 공사관원, 낭인배 등 이 행동대이고, 이들을 사주한 것이 미우라 공사임 을 간파하였다. 이후 각국 외교관의 보고와 『뉴욕헤 럴드(New York Herald)』의 특파원 코커릴(John A. Cockerill) 등에 의해 이 사건은 국제사회에 널리 알 려졌다. 난경에 처한 일본정부는 미우라가 이 사건에 연루 되었음을 시인하면서, ‘일본의 불명예를 씻기 위해’ 철저히 조사하여 관련자를 엄벌하겠다고 하였다. 사 건으로부터 열흘 뒤 미우라 공사 이하 약 50명에게 서 울 철수를 명하여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수감하였다. 그런데 새로이 발생한 서울의 사태가 일본에 게 절 호의 기회로 역이용되었다. 왕후의 피살 이후 신변 이 극도로 위태로워진 고종을 궁 밖으로 탈출시키려 던 계획이었다. 여기에는 조선 관료와 서양인 선교 사, 외교관들이 직간접으로 연루되어 있었다. 그러 나 비밀이 노출되어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자 일본 측은 서양 각국이나 일본이나 조선의 내정에 간여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논리로 역공하였다. 그 직 후 조선 내각의 이름으로 갑자기 공표된 것이 단발 령(斷髮令)이다. 이후 조선 전국은 더욱 걷잡을 수 없 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국모시해’에 이어 단발령이 공포되자 전국 각지 에서 유생들의 저항이 확산되어 갔다. 단발을 시행 하던 지방관과 일본군, 일본 상인들이 의병들에게 피해를 입는 사태가 속출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유 인석 휘하의 충청도 의병진이다. 일부는 조정과 연 결되어 있었다. 1896년 2월 7일 마침내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난하여 정국이 수습되어 가자 이들은 대부분 해산 하였다. 그러나 일부 의병은 활동을 계속하였다. 나 라 원수에 대한 복수를 하지 못했고, 단발령, 복제개 명성황후 시해 개념도(뉴시스 제공) 일본인들의 명성황후 시해장면을 그린 기록화(여 주 명성황후 생가기념관 소장) 프랑스 일간지에 실린 명성황후 시 해 장면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