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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화(朴致和)는 1919년 3월 18일 경남 하동군(河東郡) 하동읍(河東邑)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박치화는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3월 14일 하동군 적량면장(赤良面長)의 직책을 사직하였다. 3월 18일 오후 3시 경 하동읍의 시장에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다수의 군중에게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하도록 고무하였다. 시위 후 체포된 박치화는 1919년 4월 28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고, 1919년 5월 2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으며, 고등법원에서 1919년 7월 3일 상고 기각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치화(朴致和)선생의 아우 박문화(朴汶和)는 경남 하동(河東) 사람이다. 1919년 4월 7일 하동군 하동읍 하동공립보통학교(河東公立普通學校)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하동군 적량면장(赤良面長)인 박치화(朴致和)가 3월 14일 돌연 사표를 제출하고 만세시위를 계획하면서 추진되었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던 박치화는 혼자 3월 18일 하동읍 장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에 군중 수천 명이 호응하여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리고 3월 23일에는 양포면(良浦面) 장암리(長岩里) 일진학교(日進學校) 교원 정섬기(鄭暹基)와 정성기(鄭成基) 등이 주도하여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렇듯 하동에서 연이어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4월 4일 경, 이에 고무된 박문화는 하동읍 하동공립보통학교 동교생인 염삼섭(廉三燮)·정점금(鄭點金)·전석순(全錫舜) 등을 교유하여 뜻을 같이 하기로 결의하고, 학교 기숙사에서 비밀 모임을 갖고 독립만세운동을 4월 7일 하동읍 장날에 단행하기로 맹약하고, 돈을 갹출하여 태극기 50여 매를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인 4월 7일 오전 11시 40분 경, 학생 약 130여 명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학교를 뛰쳐나와 하동읍 시장을 향하여 구보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많은 장꾼들이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로 전개되려 하였으나, 긴급 출동한 일경에 의해 계획이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그는 이 일로, 이해 5월 6일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