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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할 수 있고 무장 들고 싸울 수 있는 것은 그렇게밖에 없어요, . " 무장한 빨치산이 약 명 내외라고 소문난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위500 와 같이 초라했다 여기에 수천 명의 피난민을 감당할 조직체계나 역. 량이 갖추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불갑산에서 군경의 공격에 대비. 한 체계적인 방어책을 준비하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군인이 쳐들어 온다디야 군인과 경찰 천 명이 공격한다는 정보였다" " 1 . 몇 시간 후 공격 병력이 명 불어나 명이라는 정보가 접수됐500 1500 다 불갑지구당은 후퇴를 결정했다 하지만 이 결정이 조직적으로 시행. . 되지는 못했다. 김영승의 증언에 의하면 당과 무장 빨치산은 새벽 시에 금성산으로 3 후퇴했고 무안군당은 땅속 비트 비밀 아지트 로 숨어 피해가 없었다, ( ) . 그런데 년 월 일 밤늦게까지 오락회를 한 함평군당은 새벽에 1951 2 19 조직적인 후퇴를 하지 못해 몰살당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군경은 커다란 교전 없이 불갑산을 점령했고 정, 작 조직적인 후퇴를 할 수 없었던 피난민들은 월 일까지 집단 2 20~25 학살당했다 군경의 공격이 있던 월 일 오후 용천사 입구에는 불갑. 2 20 산에 산개해 있던 주민들이 포로 로 붙잡혀 왔다 이들은 총살 후 ' (?)' . 불에 태워졌다 군 장교가 한 아기의 발목을 잡고 나무에 패대기를 쳤. 는데 나뭇가지에 걸려 천만다행 살아남았다, . 년 월 일 새벽 금성산으로 이동한 김영승은 이후 빨치산 활동1951 2 20 을 전개하다가 년 월 일 백운산 옥룡골에서 군경의 총탄을 맞1954 2 20 고 체포되었다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구형 당한 그는 최종 무. 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년에 총 년 개월의 수형생활 후 석방됐. 1989 35 9 다. 김영승은 민족의 비극인 분단과 한국전쟁이 왜 발생했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통일을 향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불갑산에서 죽. 어 나간 약 명의 억울한 죽음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는 1500~2000 . 해방 후부터 한국전쟁기까지의 대한민국의 역사를 발로 뛰며 기록했 다 또한 통일 관련 모든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영원한 소년 빨치산. . ' ' 은 오늘도 불갑산과 태청산에서 젊은이들에게 역사답사를 안내한다. - 3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