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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전 불갑산 빨치산 토벌을 위해 국군 연대가 묘량국민학교20 에 주둔했다 매일 토벌작전을 벌이는 군인들에게 지급되는 군수품은 . 형편없었다 그러자 주민들에게 밥해 놔라 닭 잡아라 돼지 잡아라 며 . " , , " 강제적인 할당이 떨어졌다 삼시세끼 해결하기도 어려운 농민들에게 . 군인들의 요구는 피 말리는 것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군경을 경원. 시할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 세상에서 미제를 몰아내고 인민이 주인 되는 사회를 만들자 교단에 선 이의 " . " 선창에 묘량국민학교에 모인 이들은 팔을 힘차게 내저으며 복창했다 . 소년단장 김영승 년생 을 포함해 삼학리 소년들도 목이 터져라 (1935 ) 외쳤다.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은 급속히 남하했다 년 월 일 광주. 1950 7 23 와 영광 함평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었다 약 가구가 살던 삼학리 신· . 15 성마을에서는 김용채 집안이 인민위원회와 유관 기관의 주요 감투를 썼다 김용채의 장남 김광길은 삼학리 민청위원장 둘째 며느리 정영애. , 는 삼학리 여맹위원장 작은딸 김영미 가명 는 묘량면 선전부장 막내, ( ) , 아들 김영승이 삼학리 소년단장을 맡았다. 선거를 통해 소년단장에 선출된 김영승은 소년 명을 모아 목총으로 20 군사훈련을 했다 소년들을 임의로 빨치산 인민군 국군 개 조로 편. , , 3 성해 모의 전투를 벌였다 민청 민주청년연맹 의 지도 아래 각종 궐기. ( ) 대회도 했다 당시 주민들 대부분이 까막눈이라 소년 김영승은 노동당 . 삼학리세포 간사를 맡아 문서 작성을 도왔다 또한 당비 징수 역할도 . 맡았고 면에서 내려오는 지시사항을 삼학리 자연마을에 전달하는 연, 락원도 했다 묘량면에서 이루어진 의용군 모집사업에 김용채의 차남 . 김영식이 제 기로 자원했다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그는 이후 고향으1 . 로 돌아오지 못했다. 인민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 을 꿈꿨던 인민공화국 세상은 오래가지 못' ' 했다 불과 개월여 인공세상을 뒤로 하고 소년 김영승 가족은 년 . 2 1950 월 일경 태청산으로 입산했다 신성마을 주민들 대부분도 입산하기 10 6 . 는 마찬가지였다 군이 수복하면 모두 죽는다 는 소문이 파다했기 . 'UN ' 때문이다. 하지만 태청산에는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소나무와 수풀만 있는 산. 이라 유격투쟁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해 월에 김영승 가족. 11 을 포함한 묘량면당부 주민들 묘량면 노동당에 속해 있거나 영향을 받( 은 이들 은 불갑산으로 이동했다) . - 3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