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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安東) 사람이다. 1907년 안동(安東)에서 유인식(柳寅植)·김후병(金厚秉) 등과 함께 협동중학교(協東中學校)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힘썼으며, 1909년에는 서울 양기탁(梁起鐸) 집에서 신민회(新民會) 간부들과 은밀히 회합하여 독립운동기지 설치문제와 독립군의 양성문제를 협의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강점당하자 1911년 만주로 건너가서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이시영(李始榮)·이철영(李哲榮)·이동녕(李東寧)·이상룡(李相龍)·윤기섭(尹琦燮)·김창환(金昌煥) 등과 더불어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재만동포의 농지개척과 이주민의 안정책을 도모하였다. 또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도 전력을 기울였으며, 아울러 군관양성과를 병설하여 젊은 장교들을 양성하였다. 1911년에는 유인식과 같이 통화현(通化縣)에 중어학원(中語學院)을 설립하여 한·중 양민족의 친선을 도모하였으며 1913년에는 합니하(哈泥河)에 여준(呂準)·이탁·이상룡 등과 함께 교포자치기관으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재만동포의 민생·교육 등에 전력을 기울였다. 동년 말경에는 이탁·김창환(金昌煥) 등과 함께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기 위하여 유하현의 밀림지대에 백서농장(白西農庄)을 개설하여 그 장주(庄主)에 추대되어 다수의 청년동지들을 규합, 3년간 교육을 시키기도 하였다. 1918년에는 길림성(吉林省) 왕청현(汪淸縣)에서 서일(徐一)·여준·신팔균(申八均)·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39인이 민족대표로서 연서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였으며 1919년에는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거족적으로 전개되자 4월 초에 이상룡·이탁 등 남만 각지의 지도자들과 상의하여 유하현 삼원보에서 부민단의 범위와 사업을 확대하여 한족회(韓族會)로 개편하고 서무부장에 취임하였으며 또한 남만 독립운동의 총본영으로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 후, 군정부가 상해(上海)임시정부(臨時政府)의 휘하로 들어가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칭되자 참모장으로 취임하여 독판(督辦) 이상룡을 보필하였다. 1920년에는 군정서를 길림성 화전현(樺甸縣)에 옮겼다가 이청천(李靑天)과 함께 그 소속부대를 안도현(安圖縣) 밀림 속으로 다시 옮기고 병사(兵舍)를 건축하여 제2군사 기지로서, 유사시에 대비하였으며 동년 11월에는 북로군정서군 및 홍범도군(洪範圖軍)과 합세하여 밀산(密山) 및 노령(露領) 등지로 이동하였다. 1922년에는 연해주(沿海洲) 각지와 흑룡강(黑龍江) 등지를 순회하며 독립운동의 책원지를 물색하는 한편, 동년 8월에는 봉천성(奉天省) 흥경현(興京縣:현재 신빈현)에서 오동진(吳東振)·현정경(玄正卿) 등과 함께 지금까지 분산 연립조직되었던 각 단체의 통합을 성공시켜 민족 단일의 독립운동단체인 통군부(統軍府)를 조직하고 그 교육부장에 임명되었다. 그 후, 약 2개월 뒤에는 통의부(統義府)가 조직되자 그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23년 1월 3일에는 국민대표회의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대표로 참석, 의장에 임명되어 회의를 주재하다가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 갈등이 계속되자 양파를 조정, 독립운동기구를 일원화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동년 6월 3일 삼십여 개의 단체의 개조파 대표와 성명을 발표하고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1월에는 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의성단(義成團)·광정단(匡正團) 등 지방단체들을 망라하여 길림성 화전현에서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자 참모장 및 행정위원에 취임하였다. 1925년 9월 24일, 이상룡이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고 이듬해 2월, 그를 국무원에 임명하였으나 취임하지 않고, 동년 10월 10일, 국무령 홍진(洪震)이 또다시 국무원에 임명하였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1927년에는 길림에서 김좌진·이청천(李靑天) 등이 정의부·신민부·참의부(參議府)를 합하여 민족유일당촉진회(民族唯一黨促進會)를 조직하자, 위원장겸 군민의회(軍民議會)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4월에는 길림에서 김기풍(金基豊)·김진호(金鎭浩)·이 탁·오동진 등 35인과 발기하여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조직, 재만농민의 생활개선과 생산증가에 노력을 경주하였다. 1931년 9월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나 일본군이 만주로 계속 진출하자 동지 이원일(李源一)과 함께 북만으로 갔다가 동년 10월 초, 하얼빈(哈爾濱)의 정인호(鄭寅浩)의 집에 투숙 중 이원일과 함께 일경에게 체포되어 신의주를 거쳐 경성으로 이감된 후, 징역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7년 3월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