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page

Special Theme • 독립만세운동 전개 실상으로 본 함경남도의 3·1독립운동 33 함경남도는 초기 3·1독립운동을 주 도한 지역이었다. 1919년 2월 하순  경부터 경성(京城)의 독립운동을 인 지했고, 지방 인사들과의 교류로 시 대 상황을 파악하여 3·1독립운동을  준비했다. 3월 1일 원산을 시작으로  3월 3일 함흥, 3월 10일 단천·북청· 신흥·이원 등지에서 대규모 독립만 세를 외쳐 3·1독립운동사상 3월 초 순부터 중순 시기에 가장 활발히 ‘조 선독립만세’를 고창한 지역이었다.  이는 천도교과 기독교 교단의 결속 력과 학생들의 적극 참여, 그리고 말 단 행정 조직원(면서기, 구장)의 활 동 때문이었다. 또 다양한 형태의 독 립운동이 전개됐는데, 독립운동은  185회나 전개됐다. 평화적 독립운 동과 아울러 공세적 독립운동도 병 행되었다. 천도교와 기독교 및 학생 들이 초기 독립만세운동을 이끌었 다. 집단의 결속력이 강했던 천도교,  기독교, 학생들이 주도한 독립운동 이 60회로, 전체 독립만세운동 116 회의 51.72%나 되었다.  2월 하순경, 3·1독립운동을 준비하다 1919년 1월 하순경 손병희(孫秉熙)의 주도하에 천도교측에서 세계 사조(世界思潮)에 호응하여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2월 중순 이승훈(李承薰) 등의 기독교측과 연합이 결성되었고 독립운동 문건(文 件)들이 제작되었다. 2월 27일 대부분의 천도교측 대표(15명)는 김상 규(金相奎) 집에서, 기독교측 대표(16명)는 최린(崔麟) 집에서 선언서 별지에 각각 서명 날인했다. 불교측도 한용운 등 2명이 지면에 날인했 다. 그리고 2월 28일 밤 손병희 집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9명이 불참하 여 24명과 함태영(咸台永)이 첫 민족대표 회합을 갖고 역사적인 3월 1 일 민족독립운동 실행에 대한 최종 협의가 이루어졌다. 한편 함경남도에서는 2월 21일경 원산에 독립운동의 움직임이 전 해졌다. 원산의 이가순(李可順)은 목사에게 서울의 독립운동 준비소식 을 듣고 이순영(李順榮)에게 독립선언서를 준비시켰다. 2월 28일 밤 진성(進誠)여학교에서 독립선언서 2,000매가 인쇄되면서 독립만세 운동을 준비했다. 곽명리(郭明理, 明輕)가 오화영(吳華英)에게 선언서 200~300매를 받아 2월 28일 밤 원산에 전달하고, 3월 1일 독립운동 때 배포됐다. 또한 함흥에서는 2월 26일 강봉우(姜鳳羽)가 신창리 교회 에서 교직자 등에게 국제 정세와 한국의 입장 등을 설명했고, 이어 2월 28일 오후 9시경 중하리 예배당에서 이재근(李根哉), 이순기(李舜基), 조영신(趙永信), 한영호(韓泳鎬) 등 교직자, 교사, 학생, 의사, 재목상, 재 봉사 등에게 시대 상황을 설명하고 독립운동 참가 및 독립만세를 권유 했다. 이들은 모두 찬성하고 독립운동 경비로 5원 ~ 100원을 자력(資 力)에 따라 기부하고 신자와 학생 등에게 권유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천도교측에서는 2월 28일 안상덕(安商德)이 보성사 이종일 (李鍾一)에게 선언서 1,300매를 받은 뒤, 밤에 영흥에 도착해서 교구장 김용환(金龍煥)에게 전달하여 다음날 읍내에 배포됐다. 이찬주(李讚周), 조종오(趙鍾浯 )를 통해 정평, 고원에 선언서가 전달됐다. 이어 3월 1일 오후 1시 홍원에 도착한 안상덕에게 선언서를 전달받은 강인택(姜仁 澤)은 함경북도로 선언서를 보내고 박조섭(朴琱 燮)과 협의하여 독립선 언서 2,000매를 등사 인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