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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명성황후 시해와 그것이 남긴 것 33 주둔 일본군 수비대가 경복궁을 기습하였다. 일본공 사관원, 영사경찰, 한성신보사 신문기자, 낭인배 등 이 그 대열에 합류하였다. 새벽 5시, 총성을 신호로 일본군이 광화문을 습격 해 들어갔고, 납치된 75세 고령의 흥선대원군 가마 가 통과하면서 훈련대가 일본인 교관에 이끌려 들어 갔다. 일본군의 침투는 북쪽의 신무문으로부터도 있 었다. 급보를 듣고 달려온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 啟 薰)이 광화문 앞에서 이들을 막아서다 일본군의 일제사격에 피격되고, 시위대 병사 8~10명이 현장 에서 전사하였다. 경복궁에서는 미국인 교관 다이(William M. Dye, 1831~1899) 장군과 연대장 현흥택이 비상 소집한 300~400명의 조선군이 저항하였으나, 무기 열세로 곧 무너졌다. 후원으로 난입한 일본의 군경은 건청 궁(乾淸宮)에서 왕후와 궁내부대신 이경직, 궁녀 등 을 살해하였다. 왕후의 유해는 근처의 녹원 숲속에 서 불태워졌다. 만행이 자행된 시간은 새벽 5시에서 6시 사이, 그 사이 일본군은 사방의 출입구를 봉쇄하였다. 사 복차 림의 오카모토가 현장을 지휘하였고, 일본군 장교 3 명이 보조하였다. 조선의 마지막 왕후는 경복궁에서 그렇게 운명하였다. 동서고금에 없는 참극이었다. 명성황후 시해의 파장과 의병의 봉기 사건 직후 미우라 공사는 즉시 은폐 공작에 들어 갔다. 먼저 고종을 핍박하여 신내각을 조각하게 하 였다. 왕후가 궁궐을 탈출한 것처럼 꾸며, 폐서인 조 칙도 강요하였다. 이어 사건을 조선군 훈련대와 순 검의 충돌로 날조하였다. 다음날 ‘범죄자들’인 훈련 대를 엄벌할 것과 일본인이 가담했다는 ‘소문’의 사 실 여부를 명백히 밝히라는 위장된 공문에 조선의 외부가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조작된 공 문까지 확보하였다. 그러나 진상은 서양 외교관들에 의해 폭로되었다. 왕태자(후일의 순종), 다이(미국인 교관), 사바틴(러 시아인으로 다이의 보조역), 현흥택(시위대 연대장), 왕후의 의녀(醫女), 궁녀, 궁중하인 등이 각기 열국 명성황후 시해의 주범 미우 라 코로의 노년기 모습(나무 위키 제공). 그는 한 때 히로 시마[廣島]감옥에 수감되었 으나, 곧 풀려났다.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데 가담한 한 성신보사 직원과 일본인 부랑배들의 모습 1897년 11월 22일 명성황후 장례식 행렬이 서 울 종로 일대를 지나가는 모습(동아일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