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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경기도 지역 3 · 1운동의 전개양상과 특징 33 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습격해 방화한 뒤 외부 와의 연락을 막기 위해 전신주를 도끼로 찍어 쓰러 뜨렸다. 이튿날 4월 2일 새벽에도 원곡면 주민들은 원곡면 사무소와 주재소·우편국 등을 찾아가 파괴하고 소작 문서 등을 방화하는 등 격렬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 다. 이에 주재소의 일본 순사들은 “탄환이 소진되어 일시 퇴각”했다고 하나 대항도 못한 채 도망쳐 나가 고, 일본 거주민들도 피신하였다. 이렇게 일본인들 을 모두 양성면에서 쫒아냄으로서 ‘2일간의 해방’을 맞았다. 이 만세운동은 당시 언론에 ‘안성사건’이라 불리며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안성읍내와 원곡·양성면 이외에도 죽산 일대 에서도 시위가 이어졌다. 4월 1일 죽산공립보통 학교와 죽산주재소·이죽면사무소에서 만세시위 가 있었으며, 2일에도 죽산시장에서 두 차례의 시 위가 이어졌으며, 주재소와 우편소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일죽면에서도 4월 2일 주천주재소와 면 사무소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고, 삼죽면에서 도 4월 3일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하게 시 위를 이어갔다. 서울의 일본 헌병사령부는 4월 2일부터 수원과 안 성군에 검거반을 4파로 나눠 파견하였다. 헌병부대 는 4월 14일까지 64개 부락에 걸쳐 가택수색을 통해 시위자들을 붙잡기 시작해 약 800여 명을 강제 연행 하였고, 이 와중에 19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원 곡·양성지역에서도 육군 보병부대가 경찰을 지원하 기 위해 파견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피살 1명, 부상 20여 명, 가옥 9채가 불타버렸다. 일제는 시위참여자의 검거가 부진해지자, 4월 19 일 현재의 원곡초등학교 뒷산에 주민들을 모이 도록 한 뒤 포위해 강제 연행하였다. 저항하거나 도주하 는 자는 참살하여 현장에서 3명이 순국하였고, 끌려 간 안성경찰서에서 5명이 부상으로 순국했다. 뒤이 어 6월 1일에도 군병력을 파견해 보복검거에 나선 조선총독부는 177명을 투옥시켜 최고 12년의 중형 을 치르게 하였으며, 41명에게 태형을 가하였다. 더 욱이 1인당 최고 409엔에 달하는 손해배상금도 부 담하게 하는 등 잔혹한 보복을 감행하였다. 3·1운동 100주년인 2019년 3월 21일 치러진 ‘용인 3·21만세운동  재현’ 행사(용인시청 제공) 용인 김량장의 만세 표지석과 좌전고개의 용인 3·1만세 운동기념탑 (이상 필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