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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충남지역 후기의병의 봉기와 일제의 탄압 33 는 것을 금지한다는 게시문을 붙이 기 하였다. 논산지역 의병은 은진분 파소와 노성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계룡산은 유 격전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 해 의병의 근거지로 활용되었다. 또 한 공주와 논산, 그리고 계룡지역으 로도 이어져 있어 이동하기에도 편 리했다. 1907년 12월에는 의병대가 계룡 산 자락의 백암동에서 일본군과 전 투를 벌였다. 일제는 연산수비대와 헌병분파소, 공주수비대, 그리고 대전 지역의 진잠 헌병분견소까지 동원하여 계룡산 의병대를 사방에 서 포위,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의병은 약간의 피 해를 입었으나 포위망을 벗어나는데 성공하였다. 금 산지역 의병은 진산 일대에서의 움직임이 활발했으 며, 금산시내로 들어가 경무분파소를 습격하기도 하 였다. 일제의 충남지역 후기의병 탄압 일제 당국은 면 단위까지 설치된 주재소의 순사대 와 분견소의 헌병대, 그리고 일본 정규군인 수비대 까지 동원하여 의병을 탄압하였다. 일제는 러일전쟁 을 일으키고 전시임을 빌미로 하여 한국의 경찰권을 박탈했다. 1905년 2월 강제로 체결된 경무고문 용빙 계약으로 한국의 경찰권이 일본의 통제 아래에 들어 갔다. 일제는 경찰 외에도 헌병을 전국에 배치하였 다. 헌병대는 1904년 3월 발족했는데, 1907년 7월 이후 의병의 항일전이 격화되자 헌병대를 확대 개편 하였다. 1908년 말 헌병대는 2,347명에 달하는 병 력 으로 증원되었다. 또 441곳에 분견소가 설치되었는 데, 이는 거의 면 단위까지 설치된 것이다. 일제는 경찰과 헌병만으로도 부족하여 정규군인 수비대까지 배치하여 의병을 탄압하였다. 일본 수비 대 중에 충남지역 의병 탄압을 맡은 부대는 보병 제 14연대였다. 이 부대는 본부를 대전에 두고 충청 지 역과 그 이남 지역의 의병을 탄압하였다. 대전에는 연대본부 외에도 대대본부와 3개 중대를 배치하였 다. 공주에도 1개 중대를 배치하였다. 보병 제14연 대 외에도 대전, 공주, 조치원, 강경, 홍산 등지의 수 비대와 연산, 남포, 청양, 면천, 정산, 유구, 홍주, 임 천, 홍산 헌병분견소, 그리고 각지의 순사주재소에 서 의병을 탄압하였다. 이처럼 일본군 수비대와 헌 병대, 순사대는 수시로 출동하여 의병을 탄압하였 다. 조선주차군사령부에서 발표한 1907년 9월부터 1909년 5월까지 충남지역 의병을 탄압한 실태를 정 리하면 다음 <표 1>과 같다. 2023년 6월 1일 ‘의병의 날’ 기념일에 당진시청에서 열린 소난지도 의병항쟁 추모식  광경(충청일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