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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영원한 주석 ’김구 33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영원한 주석’  김구가 평생의 화두로 삼았던 것은,  우리 민족의 자주와 독립, 민주와 통 일국가였다. 김구는 이를 이루고자  한평생 고투하였다. 동학농민전쟁으 로부터 의병과 계몽운동, 임시정부에 서의 활동에 이르기까지 가시밭길 역 정을 멈추지 않았다. 자주와 독립을  위해 독립운동에 매진했고, 민주주 의를 세우기 위해 민주공화제 정부로  성립한 임시정부에 헌신했다. 또 통 일국가 수립을 위해 좌우 연합정부를  구성하고, 광복 후 남북협상에도 나 섰다. 이는 크게 보면 민족문제와 사 회문제를 해결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작게 보면 김구의 자아를 실현하는  일이기도 했다. 임시정부의 상징적 인물, 김구 백범 김구를 상징하는 말이 무엇일까. 한국근현대사의 거인, 열렬한 독립투사, 위기에서 빛난 혁명가, 민족의 자주와 독립과 통일을 안고 쓰러진 비운의 민족지도자 등 실로 많은 말들이 그를 상징하고 있다.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는 필자는 김구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영원한 주석’으로 기리고 싶다. 김구는 1876년 ‘개항둥이’로 태어났다. 강화도조약으로 개항이 되면 서 외세의 침탈과 서구 근대화의 물결이 한꺼번에 밀어닥친 역사적인 해에 출생한 것이다. 운명적으로 그는 반(反)외세 자주화와 반(反)봉건 근대화의 사명을 갖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생애를 보면 이러 한 민족문제와 사회문제를 회피하거나 방기하지 않았다. 특히 김구는 사사로운 사회적 처지와 민족적 고뇌로 낙담하거나 절 망하지 않고, 이들 문제를 사회화하여 민족대중과 함께 극복하고자 하 였다. 일찍부터 자아(自我)를 실현하는 길이 사회개혁과 민족문제를 해 결하는 길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반상(班常)의 신분적 질곡 속에서 김구가 찾은 희망의 빛줄기는 동학 이었다. 그래서 그는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을 위해 18세의 약관의 나이로 황해도 팔봉접주가 되어 동학농민전쟁에 뛰어 들었다. 나아가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되자 민족적 분노를 의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기념촬영한 김구(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1921.1.1, 독립기념관 제공) 상해 체류시절 아내 최준례, 아들 김신과 함께 가족 사진을 찍은 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