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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 가평의 일과 인맥 화서 선생은 조선조 말기의 대 성리학자요, 위정척사파(衛正투%派)의 거두이다.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에서 출생하고, 벽계에서 서거하였다 1852년 홍천 삼포(三浦)로 이거하여 일감재(一鍵짧)를 짓고 향촌(챙마1)도 일으켜 도의를 강의하고 이상향을 꿈꾸었으나 겹치는 불운(不運)으로 1860년 벽계로 돌아왔다. 화촌면 삼포의 광산김씨 김재귀(金在龜)는 화서선생의 둘째 사위로 그 후손은 강원도 홍천 · 춘천 등에 번족하고 있으며 서석면 풍암리에는 화서선생 후예가 기거했었고 양평의 이계선(李繼 善), 이 장우(李長子)등 화서 문인들이 홍천으로 이주한 것이나 홍천지 방의 화서문인은 화서 선생의 삼포 이주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화서선생은 문도들에게 위정척사(衛正투!fß)를 주장학 애군여부 우국여가(愛君如父 憂國 ~IJ家)를 역설하여 민족사상(民族및上) 가장 많은 창의호국(띔義認-國)의 인물을 배출한 근대 민족주의 의 선구자이다. 19E였년 스승 화서선생이 서거하자 무진 · 기사 · 경오 년까지 3년간 동문 24명이 2명씩 12 개조를 편성하여 벽계 화서 댁에서 윤거(i剛居)할 때에 김영록(金永錄)과 같이 복을 입었다 그리고 1903년에는 포천의 최익현, 삼포의 김재귀, 춘성의 유인석 등 전국의 6백여 유림 이 화서선생 후사(後事)를 위한 강수계(講修꽃)를 조직할 때에 참여하여 그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1905년 3월 17일에는 의암 유인석과 함께 스승의 저서인 화동사합편강목(華東史合編網 目)과 중암집 (훨禮集) 간행을 논의하였다 화서선생 문하생은 한말의 거유인 중암 김평묵(金平默, 1819-1891)을 비롯하여 성재 유 중교와 병인양요(內寅洋擾)시 강원도 포수로 하여금 프랑스 함대를 격퇴한 양헌수, 평안도 의 거유인 박문일 박문오 형제와 대마도에서 순국한 의병대징- 최익현, 의군 도 총재 유인 석, 춘천의병장 유홍석, 단식 순사한 이봉환, 외세 배척을 적극 주장 상소히-다 처형당한 춘 성군의 홍재학과 보령군 남포의 백난관, 부모에 효성을 극진히 하다가 죽은 장희진, 희진 의 아들 장학수, 북인의 대가였던 임규직, 가평의 박경수, 춘성군 남면의 의병 유증악 유증 용 유증낙, 양근의 대학자 이근원, 포천의 유기일 동등은 충효 · 도학 · 절의의 인물로 화서 문하에서 공부한 화남과는 동문(同門)관계 이기도 하다 화남의 제자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어 고증할 길 이 없으나 1921년 화남의 초상화를 주선 하여 그린 장여(張如) , 강동훈(姜東勳) , 김 회식 (金會끊)등이 있다 3. 우국우도(憂國憂道)와 의병활동(義兵活動) 화남 · 중암 · 성재 삼문하(三門下)에서 위 정척사 정신이 체질화된 화남은 서교(西敎=천주 교)의 전차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걱정하였다. 그러던 중 1876년 일제의 강압에 의한 병지-조약(며子條約)의 부당함을 지적하여 동문인 유인석 · 홍재학 · 유기 일 둥과 같이 반대 상소를 올리고 1881년 개화당의 친일정책을 반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