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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경북 유림의 원로인 김창숙과 연락하여 구국운동에 참가하였다. 1922년 8월 독립운동에 참가할 목적으로 북경으로 의열단 고문인 김창숙을 찾아가 독립운동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사항에 합의를 보았다. 즉 만몽지방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그 이익금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둔전제를 실시하고,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1923년 2월 손후익과 함께 국내에 돌아왔다. 그는 1923년 4월부터 경북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김창숙에게 보내었다. 1925년 7월 비밀리에 서울에 온 김창숙을 다시 만나 독립군 양성을 위한 거액의 군자금 모집계획을 지시 받고 경북 일대에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5년 8월(음) 대구에서 김화식에게 김창숙의 취지문을 제시하고 협력을 구하는 한편, 서울 남산공원에서 손후익·이재락·이동흠·김동진 등과 함께 자금 마련을 위해 수차 회동하였다. 여기서 조속한 시일 내에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지역별로 분담하기로 하고 자신은 안동, 영주, 봉화 지방을 맡고 활동하여, 김창숙은 모금된 군자금을 가지고 상해로 돌아갔다. 그러나 1927년 6월 18일 벽옹( 翁) 김창숙이 상해에서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었으며, 그는 만주로 피신하였다가 동년 8월에 입국하여 김창숙과 함께 수감되었다. 1년여의 긴 예심과 옥살이 끝에 그는 1928년 1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7호 위반 및 공갈죄로 징역 2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고문으로 인하여 불구의 몸으로 출옥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출처 : 보훈처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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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士 一川 鄭守基 先生 紀念碑(의사 일천 정수기 선생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