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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법린의 민족의식 형성과 실천 87 적인 화해를 해야 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1904년 「한일의정서」가 체 결되었고, 일본에게 한국은 군사작전기지가 되었습니다. 장비와 인력 면 에서 한국은 일본에게 매우 유익했습니다. 러·일 전쟁 초기에 일본은 세계에 한국의 정치적 독립성과 영토의 보 존을 위해 싸운다고 선언했습니다. 한국에는 그 같은 내용으로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약속을 하였습니다. 1904년 2월 23일 체결된 「한일의정 서」 제3조를 보면,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확실히 보증할 것”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같은 「 의정서」에도 불구하 고 일본의 군사작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한국의 우편과 통신에 대 한 통제가 일본에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하자마자 한국과 공식적으로 맺었던 「의정서」와 전 세계에 했던 선언을 파기하고 총검을 들이대며 한국을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황제와 대신들의 강력한 거부, 국민의 탄원서와 통곡, 자살로 이어진 탄식, 일본 군 당국 앞에 무력한 온 국민이 주도하는 투쟁 속에서 1905년 11월 17일 일본군의 총 검과 대포의 힘으로 「을사늑약」이 맺어졌습니다. 420년 동안 이어져온 주권국가로서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2000만 국민의 분노와 저항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여러분에게 더 길게 말씀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우 리처럼 국제 범죄의 야만적인 공격을 당한 경험의 수위에 따라 여러분 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고종황제는 자주권 회복을 위해 세계 강국에 호소를 할 목적으로 1907년 헤이그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순진한 행 동이었습니까! 고종황제의 특사는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고, 일본당국은 이 사건을 빌미로 한국에서 더 단호한 정치를 펼쳤습니다. 고종은 의지가 약한 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