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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인 1884년 울산군 농소 송정리(현 울산시 북구 송정동)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고헌 박상진은 100여일만에 백부의 양자가 된다. 16세가 되던 해 당시 학덕이 높은 왕산 허위의 문하에 들어가 정치와 병학을 배우면서 의렬사들의 전기를 탐독하고 스승의 혁신유림의 길을 밟게 된다. 1907년 그의 스승 허위가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고 의병활동을 하다 체포돼 사형 당하는 모습을 본 박상진은 이후 평민의병장으로 유명한 신돌석과 의형제를 맺고 상경해서는 김좌진을 만나 뒷날 대한 광복회 부사령으로 영입하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양정의숙을 졸업한 박상진은 1910년 판사등용시험에 합격해 평양 지원에 발령까지 났으나 결국 부임하지 않고 만주와 연해주 상해 등지로 여행을 떠나 조국을 생각한다. 조국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끼던 그는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의병을 능가하는 군사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그는 해외에서 군대를 키워낼 기지를 만들기 위해 국내에서 자금과 인력을 공급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당시 그는 계몽운동과 의병활동을 통한 무력항쟁이라는 양대 전략을 구상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자금 조달이 필수적. 1912년 박상진은 가산 중 논밭 900여 두락을 저당잡혀 빌린 자금으로 대구에 <상덕태상회>라는 곡물상회를 차려 국내의 독립운동기지 및 각종 연락기관으로 삼는다. 박상진은 이후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하면서 당시 진행 중이던 중국신해혁명을 본보기로 삼고 국권회복 방향을 무장독립전쟁에 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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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은 군자금 출연을 거절하는 친일부호의 처단에 나서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대구 서우순에 대한 모금사건이다. 일명 '권총사건'. 이외 벌교부호 서도현 사살, 보성 박곡의 양재성 처단, 칠곡의 장승원 처단 등을 해나갔다. 친일인물인 장승원은 경상도 제1의 부호로 장길상, 장직상, 장택상 등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중요 인물들이 그의 아들들이다. 장길상, 장직상은 식민지 통치권력의 비호 아래 성장한 금융자본주. 특히 동생 장택상은 미군정하에서 수도경찰청장으로 있으면서, 일제하 민족해방운동가들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던 친일 경찰들을 그대로 등용하는 역할을 맡았던 인물. 지역 추모가들은 이같은 친일 후손들의 영향으로 박상진 의사의 활약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본다. 두 차례에 걸쳐 구속된 박상진은 결국 3년6개월의 옥살이 끝에 1921년 8월11일 대구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돼 순국했다. 출처 OhmyNews 박석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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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구상한 것은 비밀, 폭등, 암살, 명령의 4대 강령. 드디어 박상진은 1915년 7월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를 조직한다. 대한광복회는 1910년 국권상실 이후 독립운동을 하던 풍기의 풍기광복단 간부들과 대구지방에서 구국투쟁을 준비하던 대한광복단 지사들이 합쳐 조직한 단체. 박상진은 이 조직의 총사령이 되고 부사령에는 만주에서 활약하던 이진룡이 맡았으나 이진룡이 체포된 뒤에는 앞서 인연이 있던 김좌진을 부사령으로 임명한다. 박상진은 독립군자금 마련을 위해 전국의 부호들에게 재산에 비례한 군자금의 출연을 통고한 후 군자금 조달에 주력했으나 그리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박상진이 독립군자금 마련을 위한 공격대상으로 삼은 것은 친일부호들과 금광, 세금수송 우편마차 등이었다. 이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자금을 내놓은 부호들이 있었던 반면 완강히 저항하는 자들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