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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연유로 군이 수복하고 인민군이 후퇴하던 년 월 말부터 UN 1950 9 불갑산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인민군 점령기에 인민위원회나 여맹 . 활동을 했던 이들은 부역자 처벌을 피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갔다 불. 갑산에는 당 조직과 유격대조직이 만들어졌다 빨치산 불갑산지구에는 . 함평 무안군당과 목포 영광 나주 장성군당의 일부가 들어왔고 각 , , , , , 군당은 생산유격대로 불리는 보급조직을 운영했다 당 조직과 별개로 . 유격대조직도 있었다. 하지만 불갑산에는 빨치산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국군 제 사단은 불. 11 갑산 인근을 수복하면서 함평 영광 등지의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 때문에 청 장년들은 학살을 피해 안전한 불갑산으로 피신했다 또 불갑· . 산 토벌 작전이 임박함에 따라 인근 주민들은 총격전에 대한 두려움 , 우익 인사의 보복을 우려해 일단 피신하고 보자 는 심정이었다 또 좌' ' . 익의 강요로 입산하거나 김영택 한국전쟁과 함평양민학살 우익( , ) 『 』 인사이거나 우익 성향인데도 경찰이나 우익과의 갈등 때문에 피신한 경우도 있었다. 년 월 일 새벽 시 불갑산 토벌작전인 대보름작전 이 시작됐1951 2 20 5 ' ' 다 제 사단 연대 개 중대와 연대 수색소대가 개 방향에서 불갑. 11 20 6 7 산을 옥죄었다 명의 군인이 작전에 참여했고 국군은 적 명을 .718 , ' 1,005 사살했다 고 전과를 보고했다 국군 피해는 전사 명 부상 명에 그' . 3 , 24 쳤다. 이렇게 국군과 빨치산의 피해 규모가 크게 차이가 났을까 불갑산 빨? 치산은 명 명이라는 설이 있으나 실제 무장한 유격대원은 약 500 , 350 , 명에 불과했다 때문에 국군과의 전면전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30~40 . . 불갑산 빨치산 주력부대는 월 일 새벽 빨치산을 빠져나갔다 국군2 20 . 은 총 한 방 쏘지 않고 불갑산 연실봉을 점령했다. 국군이 사살했다는 적 명 은 누구일까 대부분 민간인이었다, ' 1,005 ' ? . 년 불갑산에서 발굴된 유해와 유품이 바로 그 증거다 2009 . - 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