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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공 규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천품이 강직하고 재기가 과인하여 어려서부터 양암서숙에 수학하고 경사를 연마하여 문명을 떨쳤다. 공은 3.1운동이 일어나자 18세의 젊은 나이에 모친상기 중임에도 불구하고 우국충정의 의분을 가눌 길 없어 분연히 일어나 태극기를 만들어 대한독립만세라 대서하고 단독으로 3월 27일 영천 장날을 기해 영천 공립 심상소학교 앞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공은 임진왜란에 창의순절한 노항공 연의 20대손으로 선조의 장렬한 기개와 혼을 이어받아 왜경의 모진 고문에도 끝내 굴하지 않고 독립을 항변하여 결국 8개월의 옥고를 치루었다. 출감 후에도 여전히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특히 대한복수가를 지어 독립정신을 고취하였으니 그 구국애족 정신은 청사에 길이 빛나리라. 광복후 조국의 평화통일을 갈망하다가 1950년 경인 7월 7일 유명을 달리하니 수는 48세로 효동 중곡 북록 걸좌에 안장되었다. 그후 1992년 4월 공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찬양하고 기리기 위하여 대통령께서 표창을 추서하였다. 아! 공의 혁혁한 자주정신과 백척불굴의 의기는 만세에 길이 남을지니 어찌 겨례의 귀감이 되지 않으리오. 이에 그 높은 뜻을 기리고 민족의 지표로 삼고저 공의 향리에 사적비를 세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