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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비인도적 만행을 자행함에 통분하여 가슴 가득 끓어오르는 학정의 혈조를 억누를길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일제 고관 암살을 목적으로 동지 이만준과 함께 상경 무기와 탄약을 입수하고 박람회날을 기하여 거사코자 무기를 운반하다 체포되여 대구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겪었으며 출옥후 만주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 재만독립단인 길림성 군정서 부속 흥업단에 가입 활약중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할 군관양성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집하라는 밀명을 받고 동지 이만준 권충락 김종만 홍종락 김우창등으로 하여금 뜻을 합쳐 1922년 5월 27일 동지 김우창과 함께 권총을 휴대하고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봉화방면으로 향하던 중 군위에서 왜경에게 체포되여 혹독한 고문에도 백절불굴의 기백으로 자주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였으나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또 다시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셨다. 공은 출옥후에도 고향에서 식민지정치를 사사건건 반대하니 사상불은요시찰인을 처절한 고초는 헤라일수없었지만 초지일관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공은 조국광복을 위하여 두차례에 걸처 2년6개월의 옥고를 겪고 환희의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통일된 조국을 못본체 1968년 무신 2월18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68세였다. 묘 천마산하 걸좌이며 배는 의성 김현락의 2녀로 부도를 다하다. 공이 서거한지 10유년에 묘도의물이 미구되여 이제 자 용고가 한국독립사와 흥업단 군자금사건 판결문을 가지고 비문을 청하므로 이렇게 엉성하게 지으나 의사의 자주독립정신을 흐리겍 할까 두려울 뿐이다. 비명을 쓰니
바다가 끓을듯 산이 무너지듯 조국을 찾은 그날의 함성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 6대주를 울렸도다. 피를 흘려 찾은 조국 자유여 창달하라. 불의와 타협없는 선비의 절기 향기롭게 길이 빛나리라. 동지여 이땅을 지키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