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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새백 일곱 가구가 살던 장교마을에서 명이 학살됐고 강영주 모자와 22 강풍전의 엄마만이 살아남았다 다행히 강영주의 남편은 전날 형님 댁에 가 .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른바 함평민간인학살의 서막이었다. . 젖 빨고 있는 아기에게 총 쏴 그날 새벽 중대 군인들이 가구가 살던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장교마을과 5 7 가구가 살던 동촌마을에 나타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군이 수복한 80 . UN 후에 북한군과 지방좌익 일부는 불갑산과 태청산에 입산해 빨치산 투쟁을 했다 대한민국 군경이 치안을 완전히 확보하지 못해 불갑산 인근은 낮에는 . '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 세상이 되었다, ' . 그러던 년 월 일 한새들전투에서 중대 군인 명이 전사하는 일이 1950 12 2 5 2 벌어졌고 산사람들은 월 일 승전축하잔치 를 벌였다 인근 마을 일부 주12 5 ' ' . 민도 참여해 마을 뒷산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꽹과리를 쳐대며 잔치를 했다 . 진실화해위원회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부하들이 전사해 분노가 ( , 2007 ) 『 』 극에 달했던 중대장은 산사람들 행위에 더 약이 올랐다 중대장 권준옥 5 . 5 대위는 불갑산 태청산의 빨치산 대신 인근 마을을 토벌하기로 마음 먹었다· . 보복은 월야면 장교마을에서 시작해 동촌마을로 이어졌다. 동촌마을에 들이닥친 군인들은 초가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을 . 논바닥 모이게 한 다음 기관총과 소총 방아쇠를 당겼다 젊은 남자는 이미 . 피신하고 대부분 노약자와 여성 들만 남은 상태였다 총격이 끝난 다음 병사 . 여 명이 쓰러진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확인 사살을 했다 두 살배기 박양 10 . 님이 총 맞아 죽은 엄마 김순란 년생 의 젖을 빨았다 아무리 빨아도 (1929 ) . 젖이 나오지 않자 아기는 앙앙거리며 울어댔다 지나가던 군인이 일말의 주. 저함도 없이 아기를 향해 발포했다. 이후 군인들이 물러가고 논바닥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김순례가 서용기(1901 년생 의 시신을 지나칠 때였다 이미 죽은 목숨이었지만 겉옷을 제대로 걸치) . 지 못한 서용기가 너무 안돼 보여 김순례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서용기에게 , 덮어 주었다 김영택 한국전쟁과 함평양민학살 두 살배기 아기에게 발.( , ) 『 』 포한 군인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총상 입은 손주를 살리기 위해 중대의 야만극은 해를 넘겨서도 계속됐다 년 월 일 함평군 해보5 . 1951 1 12 면 상곡리 모평마을에 군인들이 들어왔다 여 가구가 살던 이 마을은 파. 110 평윤씨 집성촌이었다 농촌치고는 부촌이던 모평마을은 빨치산이 보급투쟁을 . 한다며 많이 다녀갔다 모평마을이 불갑산에 가까워 당연한 일이었다. . 산사람 빨치산 이 자주 출현하자 군경은 모평마을 주민에 소개령을 내렸다( ) . 마을의 유력자들은 광주나 함평으로 피난을 갔다 하지만 다른 곳으로 피난. 을 가면 먹고살 게 막막했던 다수 주민들은 마을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여기. 에다 해보면 광암리와 산내리 대각리 주민들도 소개령을 피해 이 마을에 와, - 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