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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2025년 10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을미사변(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을 다시 본다’ 이 마침내 요동반도 반환을 결정하자 이토[伊藤博文] 내각은 자국민과 언론의 극심한 지탄을 받았다. 이 무렵 조선의 궁중 내외에서 새로운 변화가 나 타났다. 주한러시아공사 웨베르(Karl I. Waeber:韋 貝)는 영·미·불 등 열국공사와 함께 청일전쟁 이후 한 반도에서 행해지는 일본 공사의 조선 내정간섭에 제 동을 걸었다. 고종과 왕후도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 오루[井上馨]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나섰다. 이노우에 가 추진해 온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 기도가 난경에 처하자 그해 9월 초 고종과 왕후(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는 내외 귀빈을 초청하여 조선독립을 경축하는 궁중연회까지 열었다. 앞서 일본에 귀국한 이노우에 공사는 내각회의에 참석하여 조선에 대한 기증금 제공을 건의하면서 자 신의 후임자로 예비역 육군 중장 미우라 코로[三浦梧 樓, 1847~1926]를 추천하였다. 미우라가 서울에 부 임한 뒤에도 이노우에는 그와 함께 일본공사관에 17 일간 머물다 서울을 떠났다. 일본정부는 왜 무장 출신의 미우라를 주한공사로 파견하였을까? 이토는 이노우에가 추천하여 받아들 인 것뿐이라 하였고, 이노우에는 이토가 결정한 일 이라 하였다. 결국 이토내각이 처한 난경을 해 결하 자는 이들의 계획에 미우라가 해결사로 낙점된 셈이 었다. 미우라 자신도 자신은 내키지 않아 사양했으 나, 이들이 자신을 조선공사로 밀어내듯 쫓아 보냈 다고 하였다. 당시 일본 정계와 여론은 ‘거액의 전비를 쓰고 일 본의 청년들을 희생시킨 점에 비추어 보나, 장래의 평화와 일본 제국의 안위를 생각할 때 조선에서 러 시아 세력의 신장을 방임할 수 없다. 조선 왕실의 중 심이요, 대표적 인물인 왕후를 제거하여 러시아로 하여금 그 결탁할 당사자를 상실케 하는 이외에 다 른 양책이 없다’는 분위기였다. 일본공사의 시나리오와 명성황후 시해 1895년 10월 3일(양) 일본공사관 밀실에서는 미 우라 공사와 스기무라 후카시[彬村濬] 서기관, 오카 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일본공사관부 무관, 구스 노세 유키히코[楠瀨幸彦] 중좌 등이 기상천외한 왕후 제거 시나리오를 확정하였다. 무력은 일본군 수비대 로 하되 대원군과 훈련대를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마침내 10월 8일 새벽 미우라의 지시 하에 서울 평양전투를 앞두고 인천에 상륙하는 일본군 (『아사히신문』1894년 9월 12일자) 청일전쟁 당시 황해(서해) 해전에서 침몰하는 청군 군함을 그린 일본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