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page
32 2025년 3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3 · 1운동의 지역적 전개 양상과 특징 ②’ 실력항쟁으로 2일간 해방을 시킨 안성 독립만세 운동 안성군에서는 1919년 3월 11일 안성읍내에서 50 여 명에 의해 만세운동이 일어난 이후 죽산·양성·원 곡면 일대에서 연이어 전개되었다. 본격적인 읍내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30일 장터를 중심으로 태극기 70장을 흔들며 만세를 부른 200여 시위군중이 시작 했다. 안성군청 앞에 이르러 4~5백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경찰서에 돌을 던지며 밤늦도록 만세를 불 렀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기사에 의하면, 3 월 31일 오후 안성조합의 기생들이 만세를 부르며 시 위운동을 시작해 군중 1천여 명이 깃발을 들고 안성 군청과 경찰서, 면사무소에 들어가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저녁 7시경 3천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각 기 등불을 들고 시내 곳곳을 행진하다가 일본헌병의 출동으로 몇 명이 붙잡혔다. 시위는 4월 1일 안성읍 내에서 500여 명에 의해 전개하다가 일본군의 발포 로 2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다수 피체되었다. 가장 크고 격렬한 만세운동은 원곡면과 양성면 주 민들의 연합시위였다. 4월 1일 저녁 원곡면 주민 1 천여 명이 면사무소 앞으로 몰려가 면장과 서기들 을 불러내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이어 면장에게 태 극기를 주어 선두에 서게 한 후, 횃불을 들고 고개(현 만세고개)를 넘어 양성면으로 향하였다. 시위대가 양성면무소가 있는 동향리로 행진해 집결하니 그 수 가 2천여 명을 헤아렸다. 연합 시위대는 양성면사무 소를 비롯해 경찰관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 하기로 하고 주재소로 몰려가 돌을 던지며 불을 질 렀다. 이어 읍내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 안성군 양성면 만세시위자 판결문(국가기록원 제공) 안성3·1운동기념관에서 한 관람객이 일본 경찰이 조사한 ‘원곡·양성 면 3·1운동 전개도’를 살펴보고 있다(연합뉴스 제공). 안성군 양성초등학교 안에 세워진 ‘안성 3·1독립운동 발상지’기념비 (필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