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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2023년 12월 Special Theme 카이로선언 80주년 특집 해외 독립운동과 한국독립운동가들의 활약 제의 점령지 내지 식민지였던 대만, 만주, 팽호(澎湖), 류구(琉球) 등과 함께 한국의 전후 처리가 논제로 떠 올랐다. 카이로회담 직전 김구의 장제스 면담과 신탁통치 반대 카이로회담 개최 논의가 시작되던 시점보다 1년 여 전인 1942년 2월 초부터 충칭(重慶) 임시정부 내 에서는, 당시 미국정부 안팎에서 거론되고 있던 전 후 한국에 대한 국제공동관리(신탁통치) 방안에 대 한 반대 여론이 비등했다. 1940년 임시정부의 충칭 정착 단계에서부터 임시정부는 독자적 군사력의 양 성과 함께 임시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 이 두 가지 를 최대 목표로 정하고 있었는데 두 가지 모두 풀기 어려운 난제였다. 특히 임시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 인을 얻는 일은 중국의 소극적 입장과 함께 미국의 반대에 부닥쳐 성사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 측의 입장은 중국 내에 있는 임시정부가 전체 한국인을 대표하지 못하고 있다거나 한국인들이 독립국가를 영위할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하는 이유를 들어 승인 요청을 번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 국 무부 안에서는 전후 한국에 대한 일정 기간의 국제 적 공동관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었고 루즈벨트 또한 필리핀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신탁통 치 방안에 찬성하고 있었다. 1942년 4월 이후 이런 소식이 임시정부 측에 전해지자 임시정부 내에서는 이에 대한 비판과 반대 의견이 끓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은 1943년 2월 1 일자로 발표한 성명에서 전후 한국에 대한 국제공동 관리안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장 제스와 루즈벨트 사이의 회담 일정이 알려진 1943 년 7월 이후에 가서는 국제공관 반대 의견을 전하기 위해 장제스에게 면담 요청을 적극 제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1943년 7월 26일에 있었던 김구, 조소앙, 김규식, 김원봉 등 임시정부 측 지도자들과 장제스 사이의 면담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면담기록에 의하면 한국 측 참가자들은 “영국과 미국 측에서 전 후 한국을 국제공동 관리 아래 둔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데 중국 측에서 이것에 반대해 줄 뿐 아니라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장제스는 “영·미 측에서 그런 주장이 있는 것 이 사실이며 향후 많은 논란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 면서 “한국 독립운동 내부적으로 통일적 의견을 내 준다면 중국 측에서 반대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 라는 대답을 했다. 뒤에서 언급할 것처럼 장제스는 카이로에서 루즈벨트와 회담하면서 한국에 대한 ‘즉 각적인 독립’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장 제스의 이런 입장 표명이 김구 등 한국 측의 요청을 받아들인 결과는 아니었다. 카이로회담에서의 한국문제와 장제스의 “적당시 기” 수용 카이로회담에서 한국 문제는 11월 23일 만찬과 함께 진행된 장제스와 루즈벨트 사이(장제스의 부인 숭메이링(宋美齡)과 루즈벨트의 특별보좌관 홉킨즈 (H. L. Hopkins)가 배석)의 3시간 여의 회담에서 논 의되었다. 중국 측에서 만든 회의록에 의하면 이 회 담에서는 모두 10개 항목이 논의되었는데 그중 7번 째 의제로 다루어진 한국 문제와 관련하여 장제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