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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를 제작하는등 만반의 의거준비로 그해 3월 20일에 거사하여 최석호의 나팔소리 신호에 맞추어서 공과 몇몇 동지의 주도로 수 많은 군중은 구만 국천사장에 모여서 우렁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때마침 배둔장날이라 왜적 헌병대의 저지망을 뚫고 일로 배둔으로 행진하니 기세는 충천하였다. 배둔시장에서 구만회 화마암 개천 거류 동해 6개 면민이 합세하여 종일토록 만세를 외쳤으니 이것이 곧 국천배둔의 만세의거다. 공은 의거의 주모자로 지목받아 검거선풍이 불어닥치니 피신 상경하여 조선일보기자로 함경도에 특하되어서 민족사상을 고취하려하였으나 왜경의 감시로 뜻을 이룰수 엇으니 일년후에 적의 심장부인 동경에 뛰어들었다. 그곳에는 일제의 비호하에 우리동포의 고혈을 착취하던 친일파 박춘금을 두목으로 한 상애회의 횡포가 막심하므로 공은 분연히 이에 대항하여 동흥노동동맹을 창설하고 동포의 권익옹호투쟁에 위원장으로서 선봉에 서고 휘하의 청년부장 서상한열사와 항일의거를 감행하였으며 동경에서 최초로 한글인쇄소 삼문사를 설립하여 월간 동흥노동을 발간하고 동포사회의 유일한 지하 언론으로 동포를 계도하고 조국독립정신을 고취하려 흑자신문을 발행하였더니 왜경의 혹독한 핍박으로 폐간당하고 공은 투옥되었으며 편집을 맡았던 김택은 가혹한 고문으로 왜옥에서 희생되었으니 순의열사로 역사에 기리며 추앙한다. 공은 조국땅에서도 적지에서도 오로지 조국광복과 동포애 일념으로 불굴의 투지와 민족정기를 일깨워 많은 독립투사를 배출시켰으며 또한 자비로운 심덕으로 빈한한 사람을 대하면 입은 옷도 서슴없이 벗어주는 등 많은 일화를 남겼으니 왜인들도 공의 인품에 감복하였다. 왜경의 갖은 협박과 회유에도 변절치 않고 친제 봉도의 극진한 우애와 협조를 얻어서 우국애족에만 일생을 희생하였다. 아! 창천이 무심하고 명운이 유한인 조국광복을 눈앞에 둔 1945년 을유 6월 8일 쌓인 옥고성질로 사경에 직면하여 형집행정지 출감한지 한달만에 일본 피지에서 55세를 일기로 파란많은 인생을 마쳤다. 이에 광복되 그해 12월 26일에 동경에서는 재일조선인 총연맹 조선건국추진회 조선민중신문사등 범 동포단체의 합동으로 공의 추도회를 성대히 개최하여 공의 위업을 찬모하였으며 1980년 8월 14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