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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시해 사건과 단발령 사건으로 전국에서 의병 운동이 크게 일어났을 때 이병채는 허위와 함께 거의하였다. 처음에 흥양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하였으나 허 위가 일을 위하여 서울로 올라가자 이병채는 경기도 지방에서 일어난 민용호의 의진을 따라 관동지방으로 진출하여 강릉을 중심으로 관동의병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민용호의 창의에 자극을 받아서 형성된 관동구군도창의소에는 이병채를 포함하여 최중봉·성익현·민동식·한중보·이호성·차윤옥·권대형 등의 장령들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의 병력과 지혜를 모아 원산항 진격 작전을 전개하였다. 원산은 개항지로서 일본인과 그들의 병력이 집중되어 있는 지방이기 때문에 의병이라면 한 번 공격해 볼만한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경군의 집요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황해도·평안도·강원도 일대에서 그들은 용맹을 떨칠 수 있었으며, 한편으로 관동지역의 사림과 민중들에게 각종의 포유문을 발표하여 지속적인 의병투쟁과 그 지원을 촉구하였다. 이즈음 집요한 경군의 추격으로 고전하고 있던 이병채에게 소은 권인규가 보낸 격려의 글을 보면 그 당시의 어려움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북진의 첩보를 밤낮으로 바라고 있었는데, 마침내 실패하였다는 기별을 들으니 하늘이 의사를 돕지 아니하여 그런 것인가… 족하는…민 장군과 더불어 입에 피를 바르고 맹세하며 눈물을 삼키고 죽음을 무릅쓰고 의병을 일으켜, 진을 관동에 머물고 총·포를 모집하여 인재를 맞이하여 격문을 남으로 띄우자 영남이 그 약속을 받았고 의기가 북으로 향하자 관북이 따라서 호응하니 장차 강산을 깨끗이 맑히고 왕실을 부흥할 기본이 이미 확립된 것입니다. …불가불 넉넉한 집에서 거두어 들여야 하겠는데, 재물을 절약하는 방법은 우선 새어나가는 폐단을 막아야 하는 것이니, 공없는 자에게 함부로 베푸는 것은 1푼 1호라도 허락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의진의 경우도 비슷하였겠지만 관동지방 의진의 가장 고통스런 일은 군량·군자 및 무기 공급 문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민용호의 '관동 창의소 포유문'의 주요 내용이 그것이었으며 권인규의 글의 요지도 군수품 관계로 인심을 잃게 될 것을 경계한 것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제에 의하여 체결되자, 이병채는 서울 남산골에서 왜군과 싸우고자 의병 천여 명을 모집하여 전투태세를 갖추었으나 당국의 권유로 자진 해산하고 말았다. 1913년에는 독립의군부 전라북도 순무중군이라는 칙명을 받고 구국운동의 마지막 기대를 충족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1923년 4월 연해주 오소리 강변 이만에서 조선 독립단 군정서 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이병채는 김좌진·홍범도 등과 함께 장차 국내로 진입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할 작전계획을 적극 추진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는 1931년 만주사변 발발시기까지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노선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